간만에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이다. 열흘 넘게 나들이를 못 가고 동네 산책만 했던 튼튼이를 위해 야심 차게 산책 코스를 골랐다. 튼튼이는 산을 좋아하고 나는 바다를 좋아하므로 바다가 보이는 산길에 가기로 했다. 원 없이 놀다 오게 하려고 똥 봉투 여러 장과 시원한 물도 챙겼다. 긴 장마 끝에 해가 뜬 덕에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일부러 입구에서 오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차를 댔다. 낯선 곳에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튼튼이를 곧바로 사람 많은 곳에 데려가는 건 지뢰밭에 걸어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냄새들의 향연 속에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튼튼이의 모습에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모두들 평온한 가운데 혼자서 하늘을 뚫고 날아갈 것처럼 하이텐션이면 사람이어도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30kg의 대형견이 그러고 있으면 얼마나 부담스럽겠는가. 그래서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미리 똥도 한번 싸게 한 후 산책로에 들어설 계획이었다.
산책로 입구에 도달하기 전 튼튼이는 다행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매너를 갖추었다. 순조롭다. 나이스. 산책로 입구를 지나자마자 두 갈래 길이 나온다. 포장된 길과 포장되지 않은 흙 길. 사람들은 포장된 걸 좋아하지만 개는 포장을 모른다. 튼튼이의 취향에 따라 사람이 더 적은 흙 길을 선택한다. 산책에 기승전결이 있다면 ‘기’를 지나 이제 ‘승’에 접어들었다는 기분이 든다. 이대로 튼튼이와 한 바퀴 돌며 튼튼이는 냄새를 즐기고 나는 바다를 품은 산책로를 즐기고 싶다.
이대로 쭉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는 갈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풀숲 속에서 말이 풀을 뜯고 있었던 것이다. 튼튼이의 입장에서 이번 산책에 기승전결이 있다면 ‘전’은 말과의 대치이면서 말에게 전투를 신청하는 것이었나 보다. 말을 발견한 튼튼이는 발을 뗄 수 없는 강한 유혹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튼튼이의 다음 행동은 말을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물론 목줄 때문에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지만 말을 잡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은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개매너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무척 다행이었던 것은, 그 상황에서 말과 튼튼이 사이에는 수풀만이 가득 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30kg의 대형견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공포를 선사할 뻔했다. 이때 내게 허락된 말은 죄송하다는 것뿐. 튼튼이의 눈에 말 밖에 안 보이는 상황을 계속되게 할 수 없어 결국 나는 튼튼이를 데리고 퇴각했다. 결국 우리는 입구를 지난 지 10분 만에 다시 입구로 방향 전환을 했다. ‘승’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고 생각보다 빨리 ‘전’에 접어들었다. 방향 전환의 ‘전’이었다.
결국 빠르게 ‘결’은 찾아왔다. 튼튼이의 체력은 급속도로 바닥났다. 말을 잡으러 갈 수 없다면 이 산책은 의미가 없다는 듯이. 차로 되돌아가는 길에 열 번은 주저앉았다. 어르고 달래서 일어나 걷게 하면 다섯 발자국 걷고 다시 철퍼덕. 소형견처럼 안고 갈 수 있는 아이가 아니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같은 말을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목 끝까지 차오는 말 “너 지금 덥잖아. 차에 가서 시원한 물 먹자.” 또는 “힘들면 여기서 가만히 쉬고 있을래? 엄마가 물 가지고 올 테니까 기다려. 다른 사람 쫓아가지 말고.”
기대했던 산책로의 십 분의 일도 채 못 즐긴 것 같지만 이미 산책은 끝났다. 차로 돌아와 물을 먹이고 집에 가려다, 여기까지 나왔으니 반려견 동반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물론 튼튼이가 가자고 한 건 아니다. 더워하는 튼튼이 에어컨도 쐬게 하고, 둘이 다정하고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내 계획이었다. 좋은 건 뭐든지 튼튼이와 함께 하고픈 마음이랄까. 내가 목이 너무 마르기도 했다. 튼튼아, 내가 네 물만 챙겼지 내 물은 안 챙겼거든. 이제 흥분도 가라앉았으니 매너 있게 카페에 입장해보자. 카페 알지? 처음 보는 이모 삼춘들이 너 예뻐하고 만져주는 시원한 곳.
튼튼이를 태우고 가까운 반려동물 동반 카페에 갔다. 몸은 시원하게 마음은 따뜻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차에서 내린 튼튼이도 매너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카페 입구가 있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또 다시 내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 고양이였다. 이 카페에서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렇다. 반려동물 동반 카페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튼튼이는 고양이와 얌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 개가 아니었다. 튼튼이에게 매우 자극적인 존재가 있는 실내에 들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다. 개는 실외와는 다른 실내에서의 매너에 대해 모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또다시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는 나와 튼튼이가 모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계획을 세웠는데, 튼튼이의 사정은 달랐다. 나는 튼튼이를 사랑하고 존중하므로 내 뜻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튼튼이는 내 삶의 공식적이고 고정적인 ‘변수’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였다면 큰 사건 없이 산책로를 완주하고 카페에도 다녀왔을 수 있다. 하지만 튼튼이와 사정을 고려해 산책이나 카페 방문의 계획은 즉석에서 수정된다. 이러한 수정이 내 삶의 ‘상수’가 되었다. 다른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기 전에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내 삶을 오로지 내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되어도 괜찮느냐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함께 한다는 건 내 계획의 전면 수정을 뜻하는 게 아닌가. 사랑하므로 함께하겠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