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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스 Jan 23. 2024

'대저택'은 나에게 불합격을 줬어

안물안궁 '퇴사의 변'

퇴사를 언제부터 구체화시켰을까 돌이켜보니 그 자리엔 '하와이대저택'이라는 유튜버가 있다. 

자기계발 컨텐츠 크리에이터인 이분을 구독자 1000명도 안 됐던 초창기부터 좋아한 남편. 매일 아침을 '하대님' 영상으로 시작하고 그가 소개하는 책을 읽으며, 다 큰 남자가 구부정 허리 숙여 '꿈 100번 쓰기'를 하는 모습에 난 그저 웃음이 났다. 에휴 그래 뭐.. 술먹고 흥청망청 돈쓰는 것보단 건강한 취미니까 냅두자는 마음으로.


그러다 6월 초 하와이대저택 채널에 작가 채용공고가 올라왔고 남편은 나한테 지원하라며 재촉했다. 이직을 권하는 건 아니었고, 면접볼 때 사인 좀 받아달라는 황당한 주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종용이라 생각하며 한귀한흘했는데 때마침 내가 주로 컨택하던 고객사와 사소한 어긋남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하는 인터뷰 질문이 너무 구체적이라 별로고 원고도 뭔가 핀트가 안 맞는다는 피드백에 불쾌감보다는 한계를 느꼈다. 이 일을 이제 그만둬야 할 때가 된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충동적으로 하와이대저택 작가 채용에 지원했다. 그리고 하루이틀 지나 서류통과 소식과 함께 5분짜리 방송원고 과제가 주어졌다. 면접 때 과제를 갖고 오라는 요청에 또 없는 시간 쪼개가며 원고를 완성했고, 드디어 면접일이 되어 하와이대저택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나보단 남편이 먼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난 그저 호감이 있을 뿐이었는데 면접 준비를 하며 나도 서서히 채널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단 의지를 다지며 면접에 꼭 붙고 싶단 생각까지 하게 됐다. 아주 오랜만에 나를 채운 뜨거운 오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면접은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태도, 일과 관련된 모든 경험을 탈탈 털어내는 수준으로 무려 1시간 50분 동안 진행됐다. 지루할 틈 없이 대화는 끊이질 않았고, 남편의 팬심을 전해들은 하대님은 기꺼이 사인을 해줬다. 멘트는 나를 더 설레게 했다. "미리 축하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써볼게요"라며 '축하드립니다'라고 써준 하와이대저택. 이쯤되니 세상 미남으로 보인다. 내가 말한 희망연봉을 한푼도 깎지 않고 흔쾌히 오케이했으니 난 이제 더더 부자가 될거야!

크으 필체 한번 시원시원! 유노윤호 뺨치는 축하의 아이콘


그러고 1주일 동안 잠잠했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우선 귀한 시간 내어'로 시작하는 첫줄만 읽고도 불합격을 직감한 나는 한동안 멍했는데 남편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사인 받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단다. 아오 팍 씨.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 경험을 계기로 잊고 살았던 도전의식이 생겼다. 최종 불합격했지만 최종 면접까진 갔고, 어찌저찌 써낸 방송원고도 칭찬은 받았으니까. 유튜브 포함 어디든 좀더 영역을 확장해서 계속 두드려보면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긴 거다.


전례없는 1년 육아휴직을 마치고 무사히 복직까지 했던 나로서는 그만두기 쉽지 않았던 회사. 불안한 듯 안정적인, '월급쟁이'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에 걱정이 앞서지만 후회는 안 할 계획이다.


회사에서 만난 귀한 인연들과 내 명의도 아닌데 사옥부심 뿜뿜했던 회사 건물, 마음 깊이 아꼈던 사무실 구석구석, 내비에도 안 잡히는 경로라 뭔가 더 소중했던 출근길까지. 이들과의 이별이 한동안 힘들겠지만 결국은 더 열심히 쓸 수 있는 힘이 돼줄 거라 믿으며.


안물안궁 '퇴사의 변'을 참 길게도 썼는데...

지금 이 마음을 며칠 지나면 영영 못쓰고 날려버릴 것 같아 굳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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