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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Jan 11. 2019

뉴욕에서 도시재생을 걷다

[I'm in New York] ⑨ 하이라인파크와 첼시마켓에서 건진 혁신

1년 전, 뉴욕에 두 번째 발을 디뎠다.
5년 여동안 나를 쏟아부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뉴욕을 만끽하겠다고 떠난 길이었다. 그전부터 뉴욕 타령을 했었다. 한 번 짧게 내디딘 뉴욕에 혹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래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만든 회사에, 대표까지 한 사람이 그만둬고 그래도 되느냐고, 지금까지 이룬 것이 아깝지 않으냐고, 나이도 적지 않은데 괜찮겠느냐고 묻곤 했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Why Not?" 그게 뭐라고. 회사가 뭐라고. 일이 뭐라고. 관계가 뭐라고.
모든 사회적 관계, 의무에 스위치를 끄고(물론 한시적이었지만) 두서없이 맥락 없이 허허실실 뉴욕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게 당시 내 마음이었다. 다시 나는 한국에 돌아와 그 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뉴욕에 가서는 내 멋대로 뉴욕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다. 비록 몸이 태어난 곳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태어난 곳을 고향으로 삼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나는 뉴욕을 고향으로 못 박았다.
나는 여전히, 뉴욕을 그리고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에 젖어있다.  


뉴욕시(New York City, 이하 뉴욕)를 걷다 보면 가장 많이 접하는 말이 있다. 공사 중(Work in Progress)

크건 작건, ‘뉴욕은 언제나 공사 중’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그만큼 도시가 오래됐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넓게 보면,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이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역사를 거슬러 가면 17세기에 도달한다.

1626년 네덜란드가 원주민들로부터 (지금 돈으로) 1000달러(오늘날 맨해튼 부동산 가치는 약 9000억 달러) 상당의 현물을 주고 매입했다. ‘뉴암스텔담(Nieuw Amsterdam)’이라고 불렸던 도시는 1664년 영국이 점령하면서 ‘뉴욕’으로 이름을 바꿨다. 상업도시로 성장했던 뉴욕은 19세기 초 미국 최대 도시가 된다. 이후 아일랜드, 독일, 이탈리아, 동유럽 등에서 이주민들이 몰려왔고,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빚어낸 개성 있는 고층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뉴욕, 특히 맨해튼은 실업과 범죄로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총성은 일상다반사였고 범죄와 매춘, 성인오락 시설은 뉴욕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이런 뉴욕을 물갈이한 시장은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시장으로 있었던 루돌프 줄리아니였다. 다만 이 음습한 것들만 몰아낸 건 아니었다. 가난한 인민들이 보금자리를 잃었고 동네 작은 가게들이 쫓겨났다. <유브 갓 메일>에서 캐슬린(멕 라이언)이 운영하는 동네 작은 책방이 조(톰 행크스)의 대형 체인 서점에 밀려나는 풍경이 이 무렵 뉴욕을 대변한다. 즉,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과 대형화가 뉴욕을 장악했다. 지금 뉴욕의 ‘공사 중’이 그런 움직임과 동떨어져 있진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뉴욕의 주름과 속살을 보기엔 지금, 지독하게 이방인이다. 주로 시각이라는 감각에 의존하고 있기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래 말하는 것은 불완전한 감각의 작동과 제한된 정보에 기댄 단상임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뉴욕을 걸으면서, 가장 눈여겨본 것은 사람이었다. 그 살아 움직이는 꿈틀대는 존재들이 가장 큰 스펙터클이었다. 


폐선 기찻길, 재생으로 거듭나다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 이런 정의를 살펴보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후화된 기존 시가지의 인프라를 재정비하는 사업으로 공간적, 환경적으로 쇠퇴한 지역을 물리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재개발이 기존 도시를 완전히 밀고 새로 조성하는 사업이라면 도시재생은 쇠퇴한 도시를 재정비하고 개선해나가는 사업을 말한다.”(서울시 공식 블로그 ‘서울씨’ http://blog.seoul.go.kr/221000677954


도시도 생로병사를 겪는다. 각종 시설이나 건물은 낡고 삐걱거린다. 병을 앓는다. 가만 놔둘 수는 없다. 부수고 새롭게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나 이는 많은 문제와 갈등을 낳는다. 그래서 기존 시설이나 건물을 되살리고 새로이 활용하는 ‘도시재생’이 각광받고 있다. 뉴욕은 그런 면에서 좋은 선례를 갖고 있다. 특히 9·11 테러로 위기에 처한 뉴욕을 구한 것이 도시재생 사업이었다. 9·11 테러 복구와 도시재생이 맞물리면서 뉴욕은 이전보다 더 활기를 띠고 있다. 뉴욕의 재생 사업 가운데 하이라인파크, 첼시마켓, 미트패킹은 3대 도시재생 사례로 꼽힌다. (관점에 따라 브루클린 재생 등을 꼽는 사람도 있다.)

 

서울역 고가를 공원으로 만든 ‘서울로7017’이 벤치마킹한 ‘하이라인(HIGH LINE)파크(이하 하이라인)’. 뉴욕 도시재생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다. 궁금했다. 총길이 2.33km(1.45 mile)를 걸었다. 다른 말 필요 없이, 좋았다. 걷기에도 쉬기에도 더할 나위 없었고 신기한 체험이었다. 기차의 바퀴가 사람의 다리로 대체됐다. 산책로 곳곳에는 기차가 다니던 철로가 남아있다.


하이라인 탄생은 말하자면 ‘협치’로 이뤄졌다. 19세기 중반부터 상업도시 뉴욕이 커지면서 화물운송이 급격히 늘었다. 도로가 혼잡해지고 철도가 놓였으나 사건사고(‘죽음의 거리’라고 불렸을 정도)가 잇따르자 뉴욕시는 철도를 아예 지상 10m 높이로 올렸다. 건물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고가 철도는 1934년 완공됐고 우유, 고기 등 1차 가공식품을 도심으로 운송하는 중요 수단이 됐다. 당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함께 뉴욕의 명물로 자리매김할 정도였다. 그러나 산업과 도로의 변화로 고가 철도는 차츰 외면받았고 1980년 사망선고를 받았다. 우디 앨런의 영화 <맨해튼>(1979) 오프닝에 폐쇄 전 기찻길이 잠시 나온다.


‘무쓸모’로 전락한 기찻길은 철거 위기에 놓였다. 그때 두 명의 시민이 ‘반대’에 나섰다. 기찻길 재생을 위한 단체도 만들었다. 주변지역 거주민 작가 조슈아 데이비드와 화가 로버트 해먼드가 주인공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폐쇄된 기찻길을 공공 공간으로 조성해 시민에게 돌려주자는 취지를 가진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 이하 FHL)’이라는 시민단체가 1999년 탄생했다. 뉴욕시를 상대로 협상과 설득을 거듭했다. 당초 이를 없애기로 한 뉴욕시도 이들에게 설득당했다. 이 무렵 조엘 스턴펠드가 열차가 멈춘 트랙을 따라 다양한 자연이 마음껏 자라난 아름다움을 찍은 사진이 하이라인을 구하자는 움직임에 힘을 실었다.

   

산업화 시대 도시 성장의 뿌리를 이룬 중요한 기간 시설이었던 기찻길의 재생은 흥미로웠다. 산업유산을 대표하는 철도 시설을 산책로로 재생한 것은 뉴욕(도시)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표다. 철도나 자동차를 우선시했던 생각이 바뀐 것이다. 아울러 걷기가 도시의 중요한 테마가 됐음을 보여준다. 도시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이뤄진 것이다.


물론 하이라인이 공중 공원(공중 산책로)의 첫 번째 사례는 아니다. 앞서 프랑스 파리에 4.5km 길이의 ‘프롬나드 플랑테’(La Promenade Plantee·‘나무로 조성된 산책로’라는 뜻)가 있었다. 파리 바스티유 역과 연결됐던 벵센 철도가 1969년 운행을 중단했고, 버려져 있던 기찻길은 1993년 공중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비포 선셋>(2004)에서 9년 만에 재회한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가 함께 걸었던 공원이 이곳이다.

하이라인을 걷는 동안 즐거웠다. 사람이 많았지만 좁다는 느낌보다 도시에서 흔히 마주치는 풍경이었다. 식물들이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쾌적함을 더했다. 폐기된 철로에서 자라온 야생풀을 뽑지 않고 비슷한 환경에서 공존하도록 새로운 식물을 심어 재생이라는 의미를 살렸다고 한다. 특히 곳곳에 벤치가 있는데 하이라인 만의 특색을 자랑한다. 일광욕을 즐기거나 누워서 쉴 수 있는 데크도 마련돼 있다. 나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잠을 청했다.


재생 건축의 특징이겠지만, 옛것과 새것이 자연스레 섞여 있다. 기존 기찻길 뼈대를 유지하면서 주변 건축물과 조화를 생각하며 만든 덕분일 것이다. 과거 정육공장 창고 건물도 산책로에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공간은 ‘어반 시어터(Urban Theater)’라는 애칭을 가진 지점이다. 공원 아래 도로와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다. 극장의 객석처럼 경사를 만들어 놔서 창밖 도로가 화면 속 풍경 같다. 크고 작은 두 곳이 있다. 공중을 걷는 기분은 주변 건물들까지 친근하게 만들었다. 다만 건물과 하이라인이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주거지이건 사무실이건, 사생활 보호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라인에 스며든 예술작품도 산책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한편, 주변 건물을 장식한 그라피티도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하이라인 굿즈와 음식, 음료수 등을 살 수 있는 작은 숍들도 하이라인을 빛내는 조연이었다. 내게 가장 빛나는 풍경은 하이라인 옆을 흐르는 허드슨 강이었다. 특히 석양이 질 무렵 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영화, 뉴욕을 찍다》의 저자 박용민은 이렇게 말했다. “석양은 어디서나 아름답지만, 낯 모르는 이들과 어울려 감상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장소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높은 곳을 걷는 행위는 도시를 새롭게 경험하게 만든다. 그것의 경제 가치나 문화 가치를 떠나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지만 그것은 강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고, 전에는 익명의 존재였던 강 건너 마을을 이웃으로 드러나게도 한다.” 하이데거의 말은 하이라인과 주변 건물에도 적용된다.


하이라인은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만들어질 당시 예측했던 방문자수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이곳을 찾고 있다. 매년 500만 명 이상, 지난해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 걷는 사람 태반이 여행객이나 관광객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이라인이 명물임은 분명하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재생을 통한 공중 공원뿐 아니라 공원 자체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러나 하이라인에도 문제가 전혀 없지 않다. 이방인이 많이 온다는 것은 지역민들의 불편과 소외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FHL 설립자들은 한 인터뷰를 통해 지금 하이라인은 “지역민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어서 실패한 사례”라며 “지역경제 활성화는 인근 공공주택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라고 말했다. 하이라인 아래도 걷고 싶은 마음을 들게 만드는 지도 궁금했다. 물론 하이라인과 함께 첼시 지역도 되살아났다지만 지역 내 빈부 격차가 심해졌고 저소득층은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처해 있다. 상승하는 임대료로 인해 인근 중소기업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뉴욕 핫플레이스로 거듭난 첼시와 미트패킹

하이라인과 패키지로 묶이는 곳이 ‘첼시마켓’이다. 첼시마켓은 최근 맨해튼에서 가장 번화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핫 플레이스’ 첼시와 미트패킹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대서양 항해의 전성기, 첼시는 뉴욕과 유럽을 잇는 항구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선원을 비롯해 도축장 및 육가공 도매상, 청과 도매상, 담배공장, 운송 업체 등 상인들로 북적였다. 노천시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미트패킹은 이름처럼 250개 이상의 도축 업체가 입주해 있던 곳이었다.


융성했던 상공업 지구는 컨테이너선과 냉장 유통의 보편화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상인들이 빠져나갔고 이내 거리는 음산해졌다. 마약, 폭력, 매춘 등이 텅 빈 거리를 메웠다. 치안도 엉망진창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채 쇠락했던 첼시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였다. 역시 재생이 중요한 콘셉트였다.


소호 지역에 있던 뉴욕 비주얼 아트 커뮤니티(New York‘s Visual Arts Community)가 1990년대 첼시로 옮겨왔다. 이를 계기로 소호 갤러리들이 임대료가 낮은 첼시로 이전해왔다. 결정적인 한방은 ‘첼시마켓’이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과자, 오레오(OREO). 그 공장이 있던 곳이 첼시마켓이다. 1890년 만들어진 국립 비스킷 회사(NABISCO) 공장은 한때 미국 비스킷 공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다 1958년 뉴저지 공장이 가동되면서 첼시 공장은 상공업 지구의 쇠락과 함께 급격하게 무너졌다. 그렇게 비어버린 건물을 사들인 투자자는 이를 부수지 않고 공간을 살리는데 초점을 맞췄다. 빨간 벽돌 건물은 그대로 둠으로써 빈티지한 매력을 발산하도록 했다. 기본 뼈대를 두고 기계가 있던 공간에 인테리어가 더해졌고 좁은 복도는 디자인 요소로 채웠다. 조명은 약간 어둡다. 그것이 첼시마켓을 더욱 ‘힙’하게 보이게 만든다. 서울 성수동 대림창고나 합정동 엔트러사이트나 무대륙을 연상해도 되겠다.

유명 식품 브랜드와 레스토랑, 매장들이 입주한 첼시마켓은 1997년 그렇게 새롭게 탄생했다. 명성은 들었는데 놀랍다. 과자공장이 이렇게 새로워질 수 있다니. 제 역할을 다한 공장이 이렇게 감각적으로 변신하다니. 올해 2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이벤트도 열리고 있다.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벽, 천장 등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낡았다는 인상보다 세련된 미학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오래된 벽화는 첼시마켓이 비스킷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뉴욕에서도 커피 맛으로 알아준다는 ‘Ninth Street Espresso’ 매장 앞 벽에는 비옷을 입은 소년과 오레오의 오래전 광고가 그려져 있다. 버려진 드릴 비트와 노출된 파이프로 구성된 분수도 독특하다. 산업폐기물이 됐어야 할 것들이 이전과 다른 기능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 재생은 환생을 가져왔다. 

첼시마켓은 더 이상 비스킷 제조 허브가 아니지만, 먹거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첼시마켓 건너편에는 구글 사무실도 자리 잡고 있다. 도시재생의 자산으로 첼시마켓이 부상하면서 첼시와 미트패킹 지역도 덩달아 신이 났다. 개성 넘치는 부티크나 숍들이 들어선 덕에 패션과 예술 거리로 거듭났다. 특히 미트패킹은 90년대까지 도축장이었다. 이름은 그대로였지만 내용이 바뀌었다. 예술가들 유입도 이에 한몫했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그라피티에서 미트패킹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작은 돌로 채워진 도로는 유럽의 작은 도시에 온 느낌을 준다. 세상 모든 것들이 혼재된 공간, 이래서 뉴욕이구나 싶다.   

하이라인과 첼시마켓은 이른바 ‘재생 건축’이다. 건축물이 가진 과거 정체성을 해치지 않고 원형 또는 그 일부에 디자인 요소를 가미해 새로운 기능과 용도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역사와 시간을 간직하면서 독창적이고 특별한 공간이 됐다. 이방인으로서 인상비평에 불과하지만, 뉴욕의 도시재생은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 뉴욕이 시설 개조와 디자인 개량을 통해 도시(공공) 자산 가치를 높인다면 서울은 개인 재산 가치에 더 편중된 것 같다. 더불어 너무 지역 중심으로 퍼지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니 ‘우리 동네에는 특수학교를 지을 수 없다’는 식의 지역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조물주 위에 건물주’와 같은 농담 같은 진담이 나오는 것 아니겠나. 비전문가 산책자 눈으로 보기에 뉴욕은 기존 시설의 기능과 역할을 재설계한 후 도시재생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시민 참여를 적극 유도한다. 관 주도의 도시재생이 아직 익숙한 한국과 다른 점이다. 


로우라인(LOW LINE)파크도 생긴다고?


앞서도 언급했지만 도시재생은 불가피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발한다. 불평등이 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반면 도시재생을 하면서 가치 상승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의미가 없다. 가치에는 경제 가치도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재생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문제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초 ‘환경 개선’이라는 긍정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가치 상승 자체를 차단하는 방향은 아니다. 지역 주민의 요구와 의견을 수렴한 재생 디자인이 필요하다. 지금 하이라인의 아쉬움을 토로한 FHL도 지역 주민을 파트너로 섭외하고 있다. 아울러 ‘공정하고 포용적인 공공사업을 위한 반성’과 질문의 확산을 새 이정표로 삼고 연대 조직과 새로운 움직임을 꾀하고 있다. 민관 협치도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뉴욕은 또 하나의 거대한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는 지하다. 로우라인 프로젝트. 이른바 ‘지하공원’이다.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윌리엄스버그브릿지 트롤리(무궤도 전차) 터미널’을 재생한 새로운 공공 공간이다. 트롤리 터미널은 1908년 개통해 1948년 문을 닫은 이후 60년 이상 방치돼 있었다. 이에 관심을 가진 제임스 램지와 댄 바라쉬가 2011년 지하공원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킥스타터 캠페인을 통해 3300명의 후원자를 모았다. 뉴욕시도 500억 원의 자금을 보조하고 있으며 초기 단계부터 청년과 지역 고등학생을 참여시켜 협치가 이뤄지고 있다. 지하 6.1m까지 햇빛을 끌어들이는 기술로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햇빛을 공급한다. 한국 벤처업체인 선포탈의 자연채광기술이 한몫하고 있다. 로우라인 프로젝트 목표는 뚜렷하다. 시민의 삶 개선을 위해 최첨단 태양광 기술과 디자인을 도입해 새로운 공공 공간을 만드는 것. 로우라인은 2021년 완공 예정이다. 박원순 시장도 지난해 로우라인 랩을 방문했고 서울판 로우라인을 추진 중이다.

https://player.vimeo.com/video/195345536


여행·관광이든, 새로운 삶의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든 뉴욕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새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의 진정한 볼거리는 랜드마크나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건축물도, 미슐랭 별을 선사받은 맛집이나 곳곳에서 쉼을 제공하는 공원도 아니었다. 뉴욕의 현재를 이루는 사람들이야말로 스펙터클이자 진짜 볼거리였다.   

하이라인이나 첼시마켓을 명물로 만든 것도 결국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감각하는지가 중요하다. 다양한 기회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을 뉴욕으로 이끈다. 그것은 좋은 일자리나 학교일 수도, 친구나 커뮤니티, 뮤지컬, 쇼핑, 공원일 수도 있다. 물론 뉴욕에서도 불평등과 차별을 쉬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과 전망이다. 뉴욕 도시재생은 단순히 장소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기회를 누리고 만들고 싶은 사람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덕에 뉴욕은 ‘실리콘앨리(Silicon Alley)’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다. 실리콘밸리와 (뒷)골목을 뜻하는 앨리(Alley)를 합친 말이다. 맨해튼 뒷골목에서 다양한 스타트업이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각종 혁신을 빚어내고 있다. 도시재생과 그것은 맞물려 시너지를 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사는 서울과 비교가 됐다. 땅값만 올리고 많은 건물주만 배 불린 서울. 부정적인 젠트리피케이션만 부각되고 외곽으로 내몰리게 만든 서울. 지옥을 자발적으로 임대한 우리에겐 기회가 아닌 ‘포기’가 일상이 됐다. 서울을 새롭게 바꾸고자 하는 도시재생은 과거의 개발 관성과 완벽하게 작별해야 한다. 또 장소와 건물 외양만 바꿔선 안 된다. 무수한 의미의 가능성이 잠재돼 있는 저마다의 공간과 장소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되살리고 회복하는 작업이 도시재생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또한 혁신이다.   


※ 참고 : 

뉴욕시청 www.nyc.gov

OneNYC https://onenyc.cityofnewyork.us

FRIENDS OF THE HIGH LINE http://www.thehighline.org

Untappedcities http://untappedcities.com

lowline http://thelowline.org

Digital NYC http://www.digital.nyc

I MAKE 00 http://imake00.com

《영화, 뉴욕을 찍다》(박용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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