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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ry Feb 20. 2018

찻 잔

내가 만든 한 잔.






먹고 갈 건데 테이크아웃 잔에 주세요.





어렸을 때는 왠지 가볍고 실용적인 테이크아웃 잔에 커피를 마시는 걸 좋아했다. 마시다가 언제든 들고나갈 수도 있고, 찻 잔은 설거지가 제대로 되지 않을 수 있으니 일회용 컵이 더 위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빈티지 컵들에 관심이 생기면서 예쁜 찻 잔에 차를 담아 마시는 시간이 좋아졌고, 대접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학부 때 도자기를 전공하면서도 도자기 그릇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재미있게도 도자기 그릇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예전에 잠시 일했던 카페 사장님 덕분이다. 카페 사장님은 결혼하신 지 2년밖에 안된 신혼부부셨는데, 여자 사장님은 주말에만 일을 도와주시고 대부분 남자 사장님께서 카페를 맡아 운영하셨다.


남자 사장님은 빈티지 잔에 관심이 많으셨고, 각 음료에 어울리는 잔들을 찾는데에 유난히 정성을 쏟으셨다. 당시 나는 찻 잔에 음료가 나가는 게 싫었다. 요즘 카페들은 대부분 테이크아웃이 아니더라도 일회용 잔에 음료를 주는데 이 곳은 찻 잔을 사용하다 보니 설거지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커피 한 잔을 내리고 만드는데 작은 성취감이라고 해야 할까., 제대로 된 한 잔을 만드는 것 같은 느낌에 소소한 보람이 생겼다. 사장님 덕에 카페에 예쁜 잔과 그릇이 많다 보니 '이번에는 어떤 잔에 담아볼까' 하는 선택의 즐거움도 더해졌다. 


한 번은 잔을 잘 못 선택해서 만족스럽지 못했을 때도 있었고(사장님의 지시 아래 다시 만들어야 했다), 한 번은 그냥 한번 담아본 잔이 예상외로 아주 잘 어울렸던 때도 있었다. 메뉴마다 어울리는 잔과 그릇이 있었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나의 찻 잔에 대한 애정과 소유욕은 점점 늘어갔다.






그렇게 만들어 나간 찻 잔을 보고 손님들은 연신 감탄을 했다. "잔이 너무 예쁘다"라던가 '사진 찍고 먹어야 돼"와 같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차 한 잔이 주는 시간, 예쁜 찻 잔이 주는 행복감, 커피 향이 가득한 공간과 테이블 사이로 오가는 대화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까지., 차 한 잔에 그 모든 것들을 만끽한다. 향을 맡고 맛을 느끼고 눈으로 보며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보낸다.


게으르고 덤벙되는 성격 탓에 집에서는 아직도 막 사용해도 되는 나무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이 더 편하고 스타벅스 스테인리스 컵에 주로 손이 가지만, 카페에 갈 때면 꼭 잔에 달라고 말한다. 투박한 머그잔, 에이드용 유리잔, 많이 사용한 탓에 칠이 벗겨진 도자기 잔, 꽃과 나비 또는 레이스가 가득한 빈티지 잔 등등. 잔을 사용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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