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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꽃psy Jan 17. 2023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다.

만일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얼마 전, 시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3년간 요양원에 계셨고 코로나로 인해 가족면회만 되었기에 얼굴을 뵌 지도 참 오래였다. 가끔 어머니에게 외할머니 안부를 묻고 듣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사실 나는 시외할머니와 잦은 왕래가 있던 것도 아니고 많은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내게 엄청난 슬픔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남편의 외할머니이고, 어머니의 엄마이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움이 더 컸다.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어릴 때는 죽음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 걸까? 천국으로 갈까? 지옥은 진짜 있을까? 어떤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그냥 영혼은 우주의 먼지가 되는 걸까? 아니면 우주의 어떤 별에서 또 다른 나로 살아살까?


45년을 살아오며 많은 죽음을 마주했다. 아주 어릴 적엔 시골동네 나를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의 꽃상여부터 동네 친했던 오빠의 갑작스러운 오토바이 사고, 우리 엄마를 너무 많이 고생시킨 할머니의 죽음, 셋째인 나를 유난히 예뻐했던 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리고 여리던 순진한 초등학생인 내게  안 좋은 기억을 남긴 선생님의 죽음, 그리고 만우절에 접한 좋아하던 배우의 죽음까지... 이십 대 초반까지 나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가슴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아픔이나 슬픔은 아니었다. 


어리적 종소리와 함께한 동네 꽃상여는 신기함이었고 윗집오빠의 교통사고는 허무함이었다. 엄마를 괴롭힌 할머니의 죽음은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묘한 그리움이었다. 날 예뻐했다고 친구들은 말했지만 그 사람이 소름 끼치게 싫었던 나는 선생님의 부고 소식에 매우 냉철하게 반응했고, 마음에 어떤 슬픔도 일어나지 않았다. 잘생긴 남자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 배우는 거짓말처럼 만우절에 자살이라는 뉴스로 회사 모니터 앞에서 멍한 시간을 만드는 충격이었다.  죽음은 다양한 감정으로 내게 나타났지만 눈물이 며칠간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었다.

출처: 픽사베이

슬픈 죽음을 처음 마주한 것은 좋아하던 정치인의 죽음이었다.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분이었지만 처음으로 나를 보이며 열심히, 열렬히 지지했었다. 그런데 그 분이 한 줄 유서만 남기고 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뉴스를 볼 때마다, 그분의 글을 볼 때마다 베개가 축축하게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억울함과 슬픔이 저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은 너무 슬프구나...


가장 크게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한 것은 내게 가장 큰 행복한 시간을 주었지만 가장 큰 슬픔도 함께 알게 해 준 나의 쌍둥이 아들과의 짧은 만남이었다. 이제는 상처가 많이 아물고 있고, 16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여전하지만 전처럼 슬픔과 죄책감과 원망으로 나를 밀어 넣지는 않는다. 그때의 슬픔은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것이었다.


그리고 304명의 어이없는 죽음이 있던 세월호 사고에서 난  그들의 목숨이 너무 아까워 꺼이꺼이 울었다. 남겨진 그들 부모의 모습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젖 한번 물려보지 못한 자식의 죽음을 경험한 나보다 몇 천배는 더 아프고 슬플 그 부모가 더 불쌍하고 안타까워 분노와 슬픔이 차올랐다.


12살, 첫사랑처럼 가슴을 뛰게 하고 좋아해서 밤새 목소리를 들었고, 사회를 비판하며 이야기를 해주던 첫사랑이자 멘토 같았던 가수의 급작스런 사망사고는 년이 지난 지금도 울컥울컥하다. 술을 마시고 그의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곤 한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그리움이다.

출처: 핀터레스트

많은 죽음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20대에는 결혼식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30대에는 돌잔치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40대인 지금, 오랜만에 연락 오는 경우는 부고이다. 친구나 가까운 지인들의 부모님의 부고를 받을 때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곧 나도 누군가에게 우리 부모님의 부고를 알리게 되겠지. 우리 엄마아빠는 늘 그 자리인 줄 알았는데 벌써 70대 중반이고, 가끔 친정집에 가면 엄마는 내게 동네 어르신이나 먼 친척 어르신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신다.


얼마 전  엄마가 이야기하신다.

"소영아, 엄마는 죽고 나면 장례식장에서 너희들이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아프지 않다가 죽어야 해. 혹시나 엄마아빠가 의식이 없으면 절대 연명치료는 하지 말아."

"무슨 소리야 엄마?"

"너 앞집 00이 엄마 알지... 그 아줌마 그렇게 독하게 돈 벌더니 의식 없이 몇 년간 누워만 있다가 병원비, 간병비로 돈 다 쓰고, 자식들 힘들게 하다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그렇게 너희 힘들게 하고  의식도 없이 누워서 숨만 쉬고 싶지 않다. 아빠랑 보건소에 가서 생명연장거부 신청할 거야.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그리고 긴병에 효자 없다."

난 엄마에게 생명연장거부 신청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알았어. 엄마. 엄마아빠가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셔야 하니까 건강관리 꼭 잘해요!"


여러 장례식장을 다녔던 엄마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마저 슬퍼하지 않는 않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마음이 허망했다고 하신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씀.... 아프지 않게 살다가 죽어야 자식들이 힘들지 않고, 장례식에서 마음껏 슬퍼하다가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생명연장거부를 하지 마시라고 말하지 못한 냉정한 나를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고 싶다는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기도 했지만, 아픈 부모로 인해힘들게 내 삶을 만들고 싶지 않은 나의 냉정함을 인정하며 내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없으면 세상이 없어질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나, 엄마가 늙고 아파서 나를 힘들게 할까봐 걱정하는 중년의  나. 하지만 엄마의 말처럼 난 나중에 엄마의 죽음 앞에서 아주 아주 많이 슬퍼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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