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 무척 바빴다. 2019 학기가 끝날 무렵이기도 했고 이탈리아 여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학기의 마지막과 함께 하는 여행 준비는 마음도 들뜨게 했지만 하루를 너무 바쁘게 만들었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고 마무리할 것도 있어서 정신없이 돌아가던 그때, 스멀스멀 불길한 기운이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 중국 우한 지방에서 번지다 말겠지 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그 복병은 내 여행길을 살 어름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그때부터 알레르기 때문인지 열은 없었는데도 자꾸 기침이 나고 한 번 시작한 기침은 잘 멈추지 않아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걱정이 돼서 병원을 계속 다녔는데도 별 차도가 없었다. 내 불안함이 커지면 커질수록 '코로나'의 기세는 점점 강해졌다.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도서관 동아리 활동을 한 지 2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동아리 회원들과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5년을 기획하고 기다려서 '우리들만의 이탈리아'를 그려가던 중이었다. 동아리 내에서도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회원들은 용감했다. 아직 크게 우려할 단계가 아니며 이 기회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하루하루가 가까워오면서 내 마음은 태풍에 요동치는 나무처럼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대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나의 '이탈리아 여행'은 이슈가 되고 말았다. 양가 모두 맏며느리, 큰딸의 여행을 우려했다. 시어머니도 처음엔 반대를 하셨지만 노골적으로 가지 말라 말도 못 하고 애를 태우셨고, 친정 부모님들은 화를 냈다 얼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확답을 받으려고 전화를 하셨다. 그렇게 점점 나의 '이탈리아 여행'은 내 맘 속에서 식구들의 염려로 불 한번 지피지 못하고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다신 못 갈 거 같고 너무도 마음이 복잡했다. 나 혼자 그냥 안 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회원들에게도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갈 것이고, 비행기표 취소에 숙소까지 위약금도 백만 원을 훌쩍 넘게 될 터였다. 내 여행을 반대하는 부모님들의 성화에 남편도 화를 냈다. 5년 넘게 계획을 했던 것을 왜 부모님들이 반대를 하냐고. 쉰 살이 다 된 딸의 결정을 왜 부모님이 간섭이냐고. 지금 로마가 오히려 여행할 수 있는 적기라고. 지금은 우리나라가 오히려 더 위험한 거 아니냐고. 그때는 2월 초순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보다 우리나라에 코로나의 손길이 더 가깝게 뻗쳐오고 있던 중이었다. 남편은 그냥 강행하라고 나를 설득했다. 내심 남편을 핑계로 눈 한번 딱 감고 비행기를 타자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8박 9일 동안 나 때문에 애를 태우실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효녀는 아니었지만 심장이 안 좋아 서울도 갔다 오셨는데 또다시 나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걱정할 생각을 하니 선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내뱉기가 쉽지 않았다. 동생은 동생대로 '우선 출발해라~~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마'라며 길을 틔워줬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결정적으로 나의 발목을 붙들었던 것은 아무 때나 속절없이 터지는 기침이었다.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기 안에서 나를 향해 쏟아질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기에 나는 새가슴이었다. 회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여행 준비 잘하고 계시죠? 못 갈 운명이었는지 주위에 너무 자랑을 했습니다. 마루 한편에 가방을 준비해 놓고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짐을 싸고 있었는데 망할 놈의 '코로나'는 팔십이 된 부모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나 봐요. 어제 찾아뵈었는데 안 가겠다는 내 말에 안도하면서도 미안해하시는 엄마 얼굴을 보며 제 선택에 위로를 받습니다. 사실 부모님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부모님 뒤로 하고 무겁게 여행할 제 마음이 편치 않은 게 더 컸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편도가 낫지 않고 갑자기 터지는 기침에 좀 불안했어요. 나 때문에 모두 감금되면 어쩌나 하고. 학교 스케줄도 좀 꼬여서 이래저래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지금 친한 언니와 빠르면 삼월, 늦으면 사월 다른 여행상품을 찾고 있습니다. 어제 부모님께 손해배상 청구도 했습니다 동생이 준 용돈도 킵 했다가 다른 기회를 찾으면 되니 이제 섭섭함은 많이 없습니다. 다만 울 언니, 동생들과 할 추억을 못 쌓아서 그게 좀 아쉽습니다. 로마 어디에서 제주 사투리와 서울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여 깔깔댈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안전하고 좋은 여행이 될 겁니다!! 많이 느끼고 눈으로 확인하고 온몸으로 힐링하고 오세요. 응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하시라고 용돈 좀 넣겠습니다~, 저 때문에 추가 요금도 발생한 것 같고 정말 죄송합니다~ 많이는 못 넣습니다~ 가볍고 기쁘고 행복하게 다녀오세요~~~"
이탈리아에서 사진도 잘 찍어보겠다고 미용실도 다녀온 터였다. 밴드에 올린 내 편지에 언니들의 위로 전화를 받으며 나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코로나'는 학교 일정마저 뒤흔들어 놨다. '코로나' 때문에 갑자기 본국으로 귀국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학사 일정을 급하게 조정하는 바람에 학기가 뒤숭숭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2월 초부터 4월 중순까지 다시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코로나' 발생에 따라 온라인 수업과 대면 수업을 번갈아 하다가 현재 대면 수업을 진행 중이다. 나는 도서관과 학교에서도 수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갑작스레 한시적 백수가 되었다. 보통 나의 일 년은 2월엔 수업이 없어 조용하지만 3월부터는 왁자지껄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순서였는데 2020년 3월은 '코로나' 때문에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또 '코로나' 덕분에 보지 않던 것도 보게 되고 가지 않던 길도 가게 되었다. 우선 학교를 가지 않으니 아침에 세수할 필요가 없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됐으며 옷을 갖춰 입지 않아도 됐다. 잠옷이 일상복이 되고 일상복이 다시 잠옷이 되었다. 잠깐의 외출쯤은 모자에 트레이닝 복에 마스크가 전부였다. 처음엔 남아도는 이런 시간이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만 했지만 덕분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 일상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코로나'는 나에게 잠깐의 여유와 쉼을 주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일어나도 서두르지 않았고, 출근 시간에 쫓겨 아침을 바삐 움직이지 않아도 됐다. 대신에 시간이 날 때마다 가까운 오름을 가거나 걷기를 할 수도 있었다. 오름이 이렇게 한적하고 봄이 이렇게 초록 초록한 세상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동안 주변을 살피지 않았던 시간들이 후회가 됐다. 게다가 '코로나' 덕분에 나에겐 책과 함께 뒹글 뒹글 댈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막연하게 50이면 하고자 했던 글쓰기도 하기 시작했다. 그 첫 도전이 '브런치'였고 운이 좋아 가끔 내 일상을 내 생각을 전하는 공간을 갖게 되었다. 서툴고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뿌듯함에 마음 편안해진다. 그리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지니까 낯익은 것들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이 발동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냉장고 냉동실을 털기 시작했다. 빼곡히 무언가로 가득한 냉동실은 그동안 나의 게으름을 일깨워 주었다. 매년 여름에 선물로 받기만 하고 먹지 않았던 블루베리가 몇 통 있기에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잼 만들기에 나섰다. 농도를 조절하지 못해 젓다가 불을 껐다가 젓다가 기다리기를 반복하며 만든 잼을 작은 병에 담아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기쁨도 누려보았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설레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것들이 주는 기쁨을 한껏 누려볼 작정이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렇게 마음의 편안함과 여유를 준 대신 무지막지한 살도 함께 선물했다. 작년 입었던 바지가, 티셔츠가 맞지 않기 시작했다. 모두가 '확 찐자'가 되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다이어트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몹쓸 '코로나'는 대형 마트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과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관광지를 피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동선을 짧고 좁게 만들었다. 모처럼 휴일에 성산일출봉을 올랐다가 우리가 다녀온 다음 날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동선이 발표돼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는 데도 부담감이 함께 했다. 특히 육지에서 내려왔다면 우선 경계를 했다. 공항을 믿고 방역을 믿었지만 '코로나'라는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코로나'를 겪는 동안 두 번의 아찔했던 경험이 있었다. 서울서 내려온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너무도 즐거웠는데 커피숍에서 그 친구의 아들이 이태원 근처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거였다. 같이 있던 친구들도 모두 놀라 어떡해야 하나를 걱정했다. 왜 내려왔냐고 우리를 왜 만났느냐고 따질 수도 없고 화가 나는데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친구는 확진자와 날짜가 겹치지 않았고 방송에 나온 곳은 가지 않았다며 큰일 아니라고 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내일 학교에서 만날 학생들의 수와 남편 직장에서 만날 수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이대로 대면 수업이 결정되면 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친구를 보냈다. 다행히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결정되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스스로 14일 동안 가능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자발적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상황을 설명했다. 다들 '괜찮을 거야' 하면서도 슬금슬금 나를 피하는 눈치였고 화제를 돌리다가 다음에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섭섭하긴 했다. 서울로 돌아간 그 친구는 매일 아침 나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너 아무 이상 없니?, 아들은? 넌 오늘부터 보건소가 아니라 내 감시를 받아야 돼' 전화를 할 때마다 목소리가 조금만 이상해도, 전화를 조금 늦게 받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날에야 나는 전화를 멈췄다. 대신 이번엔 친구가 전화를 했다. '왜 이젠 전화를 안 해? 너 이제야 안심이구나?' 멋쩍게 둘러대는 내 대답에 친구와 나는 큰 소리로 웃고 말았지만 그때 들었던 '이태원'이란 단어는 나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나의 지나친 두려움이 친구를 생각 없고 염치없는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코로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고 모임을 주저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적으로 심한 타격을 주고 있다. 심지어 가족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생이별까지도 만들고 있다. '코로나'가 지나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아직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코로나'가 던진 동전의 양면은 결코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것은 분명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쁜 쪽에 훨씬 가깝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을 겪어내는 우리들 손에 쥐어진 동전의 앞뒤면은 우리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남아있을 거라 생각한다.
'코로나' 때문에 직장도, 돈도, 여행도, 만남도, 믿음도 희미해져 버렸지만 '코로나' 덕분에 일상의 여유를 느껴보기도 했고 내가 하고 있던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코로나'를 빼고 하루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시간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코로나' 그 녀석이 더 이상 말썽 피우지 말고, 더 이상 곤조 부리지 말고 우리를 떠나 줬으면 좋겠다.
내가 가지 못한 '이탈리아' 여행은 북적대는 로마 대신 평온하고 안전한 일정으로 끝이 났고 여행의 후일담은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툭툭 튀어나오고 있다. 그리고 내 손에 이탈리아제 레몬 사탕과 핸드크림과 치약과 커피와 책갈피가 남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이탈리아' 여행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내 여행 계획에 당분간 '이탈리아'는 빠져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위안을 삼는다면 긴장이 사라진 부모님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누가 가지 말라고 했나?'라는 핀잔에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생길 좋은 일은 없다. 애써 찾으려 했으니 편안이니 쉼이니 한 것이지 '코로나'는 우리들에게 많은 '때문에'를 남기고 있다. 하루빨리 '코로나'의 늪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