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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May 03. 2022

아버지라는 사람

ㅡ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고-

 아버지에게 갔더니 아버지가 보였다. 무서움에 떨고 있던 열네 살 소년 아버지가. 장남도 아닌데 전염병으로 두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부모님마저 이틀 사이로 돌아가셔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그 황망한 현실에 내던져진 소년 아버지가. 하늘을 잃었는데도 슬퍼할 겨를 없이 앞에 닥친 현실에 내던져진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뭐였을까? 내 몫이 아닌 다른 삶을 강요받았을 때, 장손이라서 집안을 살려야 한다는 목표로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작은아버지의 뜻에 따라 난데없이 손가락을 절단당해야 했을 때, 사랑하는 송아지의 코뚜레를 직접 뚫어야 했던 열다섯 그 소년 아버지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송아지의 코뚜레를 하며 아버지 역시 인생이라는 아픈 코뚜레를 하고, 부모라는 멍에를 짊어진 채 그렇게 모진 시간을 걸어오신 건 아니었을까?

 아버지에게 갔더니 낯선 아버지가 보였다. 갑작스러운 사랑에 방황하던 중년의 아버지가. 가족들 굶기지 않기 위해 직장을 구하러 간 서울에서 4.19 혁명에 휘둘린 백반집 딸을 구해줬을 때, 아내와는 너무도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됐지만 돌아가야 할 집과 자식들이 있다는 책임감에 갈등했을 아버지가. 아무도 몰랐던, 아니 알아도 모른 체 했던 아버지의 짧은 사랑. 답답한 마음을 북 소리로 달래며 노래로 날려 보내며 아버지 혼자 삭여야 했던 많은 시간들. 자식으로서 부인으로서는 절대 이해가 안 되지만 온전히 한 명의 인간으로 아버지를 다시 봤을 때 떠오르는 가엾고 슬프기도 했던 아버지의 청춘.

 아버지에게 갔더니 자신의 비겁함으로 평생 죄의식을 갖고 살아야 했던 나약하고 힘없는 작은 인간이 있었다. 은인 같은 박무릉을 제 목숨 지키자고 계곡 밑으로 밀어버렸던, 그래서 그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자책하며 살았던 작고 힘없는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갔더니 한없이 자식을 사랑하며 묵묵히 걸림돌을 없애주고, 모든 것을 다 퍼주었던 자상한 아버지가 있었다. 눈이 쌓인 마당엔 길을 내주고, 겨울이 되면 새 내복을 사서 입혀 주던 따뜻한 아버지.

 하지만 자식들은 몰랐다. 한평생 가난과 전쟁과 외로움에 허덕였던 아버지의 마음을. 그래서 몽유병에 우울증에 허덕이며 삶을 살아온 작고도 작은 아버지의 모습을 말이다.

 


 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이렇게 작가인 '헌'의 시선을 통해 자상한 아버지 뒤에 감추어진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딸을 잃은 '헌'과 딸을 잃어버린 '딸 헌이'를 바라보는 아버지. 서울과 J시라는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음에도 고향으로 내려온 헌은 아버지와 자신이 새벽 같은 시간에 깨어 있음을 알게 되고 낯선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하며 자신이 너무도 아버지를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슬픔을 추스리느라고 아버지를 외면했던 자신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헌이는 아버지를 추억하게 되고, 작가는 헌이의 입장을 빌려 아버지를 다각도로 보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다. 가장 믿고 소중히 생각하는 딸 헌이와 같은 장남이라는 굴레를 가진 첫째 아들의 입장에서, 태어나자마자 죽을 고비를 넘긴 둘째 아들의 추억 여행을 통해 그리고 막내 아들과 딸, 정다래(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소환되었다. 자식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부모와 다름없었던 누나의 눈을 통해 본 아버지는 조용했으나 일등 농사꾼이었고, 자상했으나 때론 엄했고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지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고집스런 면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아버지의 인생을 관통하는 부모의 부재와 가난, 그리고 6.25를 비롯한 한국 현대사의 생채기가 만들어낸 아버지만의 무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추억하게 하는 나무궤짝이나 편지, 북, 그리고 부채 등은 비밀스럽기까지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소재로서의 역할을 맡는다. 기억을 더듬다보면 서로 왜곡된 기억도 있었고, 새로 알게 된 사실도 많았다. 그리고 점점 왜 아버지가 자식들의 졸업 사진을 걸고 싶어 했는지, 왜 아버지가 자식들이 원하는 일을 했으면 하는지, 왜 아버지가 가끔 사라졌다가 집으로 돌아오는지. 그리고 왜 아버지가 몽유병을 앓아 밤마다 자신도 모르는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고통을 마주하기 위해 작가는 헌이가 핀란드 헬싱키에서의 '백야'를 경험하게 한다. 잠을 자고 싶으나 도통 어두워지지 않는 환한 낮 같은 백야. 아마도 헌이는 그 경험을 통해 아버지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아버지께 건네지 않았던 졸업 사진을 전해 비워졌던 벽을 꽉 채우게 만들어 드린다. 아버지와 헌이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유언을 통해 자신은 그동안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살아낸 것이라고 고백한다. 자식들 덕분에 용케도 살아냈다고 말이다.



 자식들은 큰 산 같은 아버지를 바란다. 또 당연히 아버지는 슈퍼맨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 아버지가 처음이고, 깜깜한 밤이 무섭고 암담한 가난에 울고 싶은 한 인간이었다. 해결책을 알지 못해 불안해 하고 갑자기 닥친 어려움에 당황하고 지금을 피해 어디론가 숨고 싶은 사람이란 걸, 우린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알고도 외면했는지 모르겠다. 혹시나 자식이라는 핑계로 아버지에게 무거운 짐이 되진 않았나 다시 살펴볼 일이다. 아버지이기에 아버지 인생을 담보로 우리들의 삶까지 책임지라 강요하지 않았나 되돌아본다. 아버지여서 인내했고 자식이여서 누리고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도 자식이고, 어머니기에 세상의 많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닌 개별적이고 특별한 그들만의 시간을 되돌려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수많은 아버지들에게 이 소설을 통해 감사와 사랑의 말을 건네고 있진 않을까? 책의 두께만큼 아버지를 향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나보다. 그 작가와 함께 책을 읽는 내내 짠하기도 하고, 아타깝기도 했으며 가슴 따뜻해지는 경험을 했다. 아버지로 살아온 그 시간을 단숨에 다 갚을 순 없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이 잠시나마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작고 소박하지만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지금도 어디선가 아버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아버지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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