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를 읽고-
지인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토너’를 읽었는데 생각할 것이 많다는 감상을 들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이기에 누구나 만날 수 있고,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며 누구나 한 번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인 것 같은데, 뻔한 스토리라 결말을 훤히 알 것 같은데도 책장을 덮을 즈음엔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평생 노동으로 살아가지만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아버지와 인내하는 것으로 삶을 견뎌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토너. 이 가족은 힘겨운 농사일로 엮어진 고달픈 생활을 감수하면서도 더 좋은 농사법을 배우기 위해 아들을 컬럼비아에 있는 미주리 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스토너는 생전 처음 고민과 고뇌를 안겨준 영문학에 매료되고, 냉정한 교수였던 아처 슬론의 도움을 받아 영문학으로 전과를 하게 된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말속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끌어줄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책 읽기와 문학은 그에게 신세계와도 같은 분야였다. 마치 영화 ‘위플래쉬’에서 드럼의 극치로 가기 위해 제자를 몰아붙이는 플랫처 교수와 피 흘리는 손에 헝겊을 감고 드럼을 치고 있던 앤듀류가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했다. 학문에의 이끌림을 묘사한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하는 문장처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스토너가 느끼는 그 부분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농사밖에 몰랐던 스토너가 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교실 안으로 비치는 빛에 취하는 모습을 보며 나와 그가 아처 슬론의 말대로 책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작가들이 걸어오는 질문에 답을 하며 희열을 느낀 경험을 공유하는 동지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스토너는 진심으로 학문을 사랑하고 제자를 아끼는 교육자였다. 영문학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었지만 점차 열정적으로 강의에 매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학문과 교육자로서의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고 세미나 주제에 맞지도 않는 발표로 스토너를 공격한 파커와, 같은 장애인이며 파커의 논문 지도 교수였던 로맥스와의 갈등은 스토너가 교수 생활을 하는 내내 불합리한 대우를 받게 만들었고 결국 학생들까지도 두 교수 사이에서 힘들게 되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파커와 로맥스 대 스토너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는 워커의 예비 구두시험에서 스토너는 파커의 허를 찌르는 질문의 공세를 펴게 되는데 자신만만했던 파커의 웃음이 당황함으로 변해가는 그 강의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넘치고 속이 확 뚫리는 통쾌함을 맛볼 수 있었다. 또한 스토너가 마지막에 교수의 수업권을 아무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용하여 전세를 역전시켜 자신의 전공을 모두 찾아오는 장면 역시 비뚤어진 권위와 오만함으로 점철된 대학 세상의 한 단면을 깨부수는 것 같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부정직하고 무지했던 파커를 절대 교단에 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스토너.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학과장이 된 로맥스의 횡포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감정을 이입해 본다. 자신의 생계와 삶의 수단을 버리고서 끝까지 신념을 고수할 수 있을까? 구호로 끝나는 신념이나 결심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툭하고 던져보는 공약 따위 아무나 가능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조여 오는 압박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것을 지키리란 결코 쉽지 않다. 따가운 시선을 견뎌가며 무료한 시간을 채워가는 스토너의 모습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정말 안쓰럽다 느껴졌다. 조금의 타협점도 없는 것일까? 내가 핀치가 되어서 그 문제를 빨리 해결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스토너는 캐서린 드리스콜과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사랑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랑이라는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 같은 사랑을 말이다. 부인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에서 충족되지 않았던, 사랑과 학문이 조화를 이루는 사랑,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랑, 편안하고 따뜻한 안식을 찾은 것 같은 그런 사랑. 그러나 ‘불륜’이라는 사회적 시선과 압박은 결국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과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둘은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진심과 존경은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서로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특히 레이크 오자크 휴양림에서의 편안한 사랑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279쪽)” 스토너와 캐서린의 사랑을 표현한 이 부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테레자를 떠올리게 했다. 육체와 영혼 사이에서 갈등하는 테레자가 이 둘의 사랑을 보았더라면 그렇게 심한 마음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사랑, 정치, 역사를 다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제1차, 2차 세계 대전을 아우르며 학문과 사랑과 전쟁을 다루는 ‘스토너’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스토너의 마지막을 묘사한 장면은 압권이었다. 암과 싸우던 스토너가 진통제에 의지한 채 그려보는 환영들. 학교와 학생들과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초여름의 자연들이 어우러져 방의 침묵 속으로 스르륵 떨어지는 책으로 스토너의 생을 마감하게 한 부분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한평생을 성실과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를 보내기에 너무 아쉬운 이별이었다.
이렇게 스토너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고민들을 던져주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교육과 신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행복일까까지. 잔잔하지만 묵직하게 다가온 등이 굽고 희끗희끗한 노교수의 만남은 아직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아픔이 없는 그곳에서 그는 지금쯤 행복할까?
1. 스토너의 이디스가 궁금합니다. 직접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억압을 받은 이디스는 결혼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독설을 내뿜고, 스토너의 짐을 내팽게치는 행동을 보이지만 결국 스토너 곁을 지킵니다. 이디스는 스토너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2. 임신을 해서라도 엄마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그레이스에게 스토너가 아버지로서 보여준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가족의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을까요?
3.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자진해서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참여하는데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스토너의 행동에 대한 의견을 말해주세요.
4.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문장엔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