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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Oct 02. 2021

욕망의 냄새, 욕망의 끝, 욕망의 자유

「사랑의 세계」, 이희주

출처: unsplash


어떤 순간에건 주체가 되는 것은 자유롭고 행복한 일일까? 욕망의 주체란 말은 언뜻 달콤하고 대범해 보인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욕망의 주체를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아연해진다. 이희주 「사랑의 세계」에는 욕망되지 못하는 욕망의 주체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그 주체들의 속내는 비릿하고 끈적한 자조로 가득하다.     


회사 사람의 소개로 연인도 만났습니다. 대단히 빛나거나 매력적이진 않지만, 그냥 내 수준에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세계」, 181p     
또 이러지. 입에서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너는 매번 그러지. 타무라는 되고 나는 안 되고. 왜?
왜 안 되는 거야?
왜?

「사랑의 세계」, 262p  


누구나 자신을 완전하게 이해해줄 타자를 욕망한다. 하지만 이 완전한 이해에 대한 욕망은 실현 불가능하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매번 교묘하게 어긋나는 현실에서는 나의 빈 공간을 꽉 메워줄 완벽한 존재도, 영원한 만족의 대상도 없다. 언어의 왜곡을 통해 우리는 내면을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전달받을 수 없다. 그러니 욕망하는 주체란 언제나 갈급한 자이다. 하지만 「사랑의 세계」 속 인물들의 갈급함은 유독 더 짙다.


이들은 욕망하기 자체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하는 이들의 내면은 때로는 활화산 같고 때로는 끝을 절대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컴컴하고 깊다. 내면은 감정의 파고로 요동치고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은 커지지만 욕망의 대상을 쟁취하려는 행동 자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지윤을 욕망하는 니카이도는 지윤에게 만남의 제안이나 자신의 마음을 발화하지도 않은 채 지윤의 뒤에서 지윤만을 바라보며 따라간다. 니카이도는 지윤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길 의도도 없지만 자신의 구체적인 욕망을 드러낼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양상은 지윤을 욕망하는 마이에게서도, 지은처럼 매력적인 외형으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걸 욕망하는 효진에게서도, 지은을 욕망하는 지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행동은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을 쟁취하려는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욕망하는 자신을 겨우 드러낼 뿐으로,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그나마 행동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행동이나 발화들은 애초에 욕망하는 자신을 한 번도 당당하게 드러내 본 적 없는, 혹은 그럴만한 기회나 장을 갖지 못한 사람처럼 뒤틀린 채 드러난다.     


“그럼 집에 있는 건 누가 먹어?”
지윤이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내 눈치를 살폈습니다.
“버리긴 아까운데.”
“아.”
나는 빈정 상한 걸 숨기기 위해 일부러 더 과장해서 비비꼰 말투로 말했습니다.
“버리는 건 나 먹고 새거는 지은이 주라고?”

「사랑의 세계」, 142p     
그날 밤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이 짱의 프로필이 올라와 있는 사이트를 찾았습니다. 얼굴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지만 보자마자 알았습니다. 거기서 이 짱은 ‘윤’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스물여섯. 가타카나로 적힌 그 이름은 한국 이름 같기도, 일본 이름 같기도 했습니다. 나는 고민하다가 가명으로 예약 메일을 보냈습니다.

「사랑의 세계」, 231p    

 

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이렇다 할 속 시원한 해피엔딩도, 제목에 걸맞은 사랑의 결실도 없지만(물론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활용할 줄 아는 지은은 류 상과 쌍방향의 결실을 맺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랑의 세계다. 이들은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면 세계가 곧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열렬하게 사랑한다. 쌍방향으로 교류되는 사랑은 사실 타인의 욕망일지 모른다. 이들은 마음껏 열망할 수 있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마음껏 상처 받았다가 마음껏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실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부족했던 겁니다. 그들이 뭐가 됐든 신이든 사랑받는 신의 아이든 우주선에 탄 사람들이든 지구 최후 최후의 날에 살아남은 둘이든 둘로는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셋이 되어보자, 넷이 되어보자 하고 점점 늘어났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 둘은 서로의 반쪽이고 둘로써 완결이 되기 때문에.
이곳에 온 뒤로 나는 단 한 번 꿈을 꾸었습니다. 섬이 가라앉고 산호가 죽고 고래 피가 흐르고 산 돼지를 묻고 우라늄을 먹고 마시면서 나이든 내가 살아가는······.

「사랑의 세계」, 271~2p     


욕망의 냄새는 다양하다. 「사랑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욕망에서는 락스 냄새, 김치 냄새, 쓰레기장 냄새,  냄새가 난다.  냄새들은 제거되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타인도  냄새의 정체를 쉽게 알아차린다. 불쾌하고 찐득한 욕망들은 급기야 각자에게 떼어놓을  없는 냄새들로 형상화되고, 다른 삶을 시작하고  뒤에도 내내 따라다닌다. 욕망은 지칠  모른다. 아니, 욕망하는 주체들은 지칠  모른다.


이 글을 시작한 질문으로 되돌아와 보자. 어떤 순간에건 주체가 되는 것은 자유롭고 행복한 일일까? 행복은 분명 아닌 것 같다. 불쾌한 냄새가 평생을 따라다니는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주체는 어떤 순간에건 자유롭다. 특히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욕망의 주체들은 가장 자유롭다. 가장 끝까지 간다. 가장 지칠 줄 모른다. 그들에게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가장 자유로이 가장 끝까지 가는 자들이다.      


창밖에서 흰 번개가 내리쳤습니다. 그 빛에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어간 칼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핥아보니 짜고 쓰라렸습니다. 두 사람의 피가 같은 맛이라는 게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사랑의 맛이었습니다.

「사랑의 세계」, 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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