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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Mar 19. 2022

나는 오래된 영화를 언제까지고 돌려보듯

우리 아빠는 돈 한 푼 없어도 항상 자신감 있는 사람. 긍지에 가득 차 있는 사람. 스스로 불행의 나락으로 절대 빠져들지 않는 사람. 단단한 사람. 그리고 나에겐 자상했다. 어린 내가 많이 걸어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내 무릎을 자주 주물러주고 항상 내가 좋아하는 빵을 한가득 사서 들어오며 ‘빵순이 잘 먹네.’ 그랬다. 엄마는 맨날 맛없고 싼 빵만 사 온다며 경멸하듯 말했지만, 소보로와 단팥빵은 매일같이 먹어도 맛있었다.


나는 아빠와 몇 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서 아빠가 내준 숙제를 열심히 했다. 아빠가 친구를 만나고 있으면 나도 가도 돼? 하고 아빠가 친구와 하는 말들을, 친구가 아빠에 대해 해주는 말들을 들었다. 가끔은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밌었다.


언젠가 대학생 때는 타지에서 버스를 잘못 타 생전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어느 낯선 시골에 떨어졌다. 남아있던 현금을 탈탈 털어 겨우 전주행 버스 티켓을 사서 전주에 돌아올 수 있었을 때, 500원이라도 티켓이 비쌌으면 나는 티켓을 못 살 뻔 했을 때,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아빠와 아빠 친구들이 모인 막걸릿집에 가 말했다. ‘나 거기서 전주 못 올 뻔 했어. 돈이 없어서. 큰일 나는 줄 알았어. 근데 딱 버스 티켓만큼 돈이 있었어.’ ‘큰일 아니야. 아빠가 데리러 가지.’ 아빠랑 얘기하면 모든 것들이 큰일이 아니었고 그 순간만큼은 나도 담대해졌다.


아빠는 어디에 있든 나를 찾으러 올 것이다. 엄마가 우리를 데리고 숨었을 때에도, 걸어서 반나절이면 그 지역을 다 둘러볼 수 있는 그 촌에 숨었을 때에도, 아빠는 일 년쯤 우리를 전국 방방곡곡 찾아다녔다고 했고, 결국 찾았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열 살이었나. 환히 웃으며 걸어 들어오는 아빠를 마주했던 그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 너무 놀라서 나는 숟가락을 든 채 멈춰 있었다. 옆에 앉은 친구가 ‘아는 아저씨야?’하고 물어보았다.


아빠의 트럭 옆자리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인생과 정신에 관한 것들. 진짜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들. 진짜 자유라고 할 만한 것들. 진짜 존엄이라고 할 만한 것들. 진짜 자연이라고 할 만한 것들. 진짜 긍지라고 할 만한 것들. 진짜 본질이라고 할 만한 것들.


하지만 아빠는 돈 때문에 결혼에 실패했고, 돈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과 단절되기도, 돈 때문에 누군가를 상처 주기도 했다. 나 역시 서울에 혼자 올라와 살며 가장 크게 겪은 문제는 돈이었다. 가끔은 돈이 너무 없어서 죽고 싶었다. 뭘 포기하고 뭘 보지 않아야 돈이 모이는지, 돈을 어디서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몇 년간 우왕좌왕하면서 살아남았다. 지금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안 할 수 있을 정도로 벌고 있지만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 중 누가 아프면? 내가 아프면? 갑자기 실직하면? 금세 늙어버리면? 젊음은 짧고, 많은 돈이 필요한 늙음은 성큼성큼 다가온다.


이제는 모두 재테크에 대해 얘기한다. 코인과 주식, 부동산, 부를 축적하는 여러 방법들, 소문들, 돈을 잘 굴려 누구보다 잘 사는 실존하는 아무개에 대한 이야기. 이것은 전설이 아니고. 그래서 나 또한 열심히 구르거나 굴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때때로 돈에 나도 온 힘을 다해 임해 보기도 한다. 이제 내 목표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가족과 나에게 여태 해보지 못한 윤택하고 다양한 경험을 주는 삶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낭만이라고 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인다. ‘중간에서 만나자. 걸어가고 있을게. 우리가 만나야 될 곳을 알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러 뛰다시피 걸었다. 바람이 춥게 오는데도, 나는 완연한 봄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예전 남자 친구와는 특별한 데이트 없이도 그 애와 대화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라서, 둘 다 돈을 아끼자고 집에서 라면을 끓일 때, 나는 ‘너랑 라면만 먹어도 좋아.’라고 뱉었다. 나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그 애랑 평생 이렇게 얼굴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으면 라면만 먹어도, 집이 좀 좁아도, 비싼 옷을 사 입지 못해도 훗날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애는 그때 바로 ‘나도.’라고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걷는 걸 내가 얼마나 행복으로 느끼는지. 아니면 같이 많이 걸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인지. 혜원 언니 집에서 진명이와 소월로를 쭉 걸어 우리 집까지 왔을 때, 진명이와 종일 지하철과 도보만으로 후암에서 성수로, 성수에서 합정으로, 합정에서 후암으로 걸으며 대화하고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는 진명이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을 때, 재이와 함께 걸었던 여름 광화문과 청계천, 창순 그리고 혜민이와는 남산에서 해방촌까지 걸어갔지. 막다른 길이라고 적혀 있는 안내판을 신나서 찍으며, 여긴 막다른 길이 왜 이렇게 많냐며 웃었다. 그때 나는 퇴사 기념으로 혜민에게 받은 큰 꽃다발의 향긋하고 싱그러운 꽃냄새를 맡으며 걸었었다. 엄마와는 궂은 날씨에 한남동에서 이태원까지 걸었는데도 참 좋았다. 엄마에게 ‘여긴 걔랑 왔었어. 저긴 맛있어. 저긴 맛없고. 여기 편집샵도 가 볼까?’ 대화를 하면서. 혼자서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는 엄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씩 걸으며 돌아다녀도 엄만 힘들단 소리 하나 없었다.


이제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데도 같이 오래 걸었던 추억이 있는 사람은 꿈에  나온다. 어쩌면 J  년이 넘도록  꿈에 등장했던 이유도, 유럽에서 며칠을 매일 걸었기 때문일까.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길거리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걸음으로 남긴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다. 노을 지기 직전의 몽마르트를 올라가고, 여기가  강이구나, 알아채고 사진을 남기고. 에센에 도착한 첫날밤 새벽에 깨어 뒤척이는 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 J. 오래된 부부처럼 팔짱을 끼고 우리는 첫새벽에 에센의 어느 귀퉁이를 걸었다. ‘저런 집은 어때? 네가 하도 결혼하자고 해서 나도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지. 저런 집에 살면 어떨까 하고.’


내게 같이 걷는다는 행위는 무조건적인 낭만인가 보다. 목적지가 있는 걸음도, 정처 없는 걸음도, 아주 잠깐이더라도, 참 좋아서, 수많은 거리에서 수많은 걸음을 함께 한 사람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벤츠 옆자리에 타서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친구와 걷다가 지쳐서 지하철을 타는 것은 두고두고 꺼내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하루를 남긴다. 걸으며 우리는 얼마나 생기롭게 이야기하고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는지.


그런데 정말 나는 돈이 부족한 낭만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일까? 낭만에 젖어서 마음이 말랑해지고 부풀어 오를 때마다 한편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불안의 나무가 있다. 나도 돈이 없는데, 저 남자도 돈이 없다. 그런데 같이 비싼 밥을 먹고 싶을 때는 어떡하지? 같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으면 어떡하지? 남들이 받는 선물을 나도 기념일마다 받고 싶으면 어떡하지? 그런 걸 부러워하지 않을 자신? 저런 건 사치라고 여기고 다 포기하더라도, 둘 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결혼을 하지? 어떻게 우리 가족들이 약해졌을 때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지? 어떻게 비좁은 집에서 서로를 상처 내지 않으며 살 수 있지?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막상 닥치면 결국 누군가는 누군가를 원망할 것이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푼 마음을 금세 꺼트릴 수 있다. 가장 큰 비눗방울도 땅에 닿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요즘은 낭만을 생각하면 심란하고, 기분이 좋을 때에도 답답해진다. 낭만은 내가 생각하는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또 피할 수 없는 의문. 나는 안전한 요새에서 사랑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인가? 혹은 안전이 보장된다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인가? 혹은 스스로 그렇게 기만할 수 있는 사람인가? 혹은 정말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에 끝이 없다.


하지만 나는 명상할 때에 당장 내일 내야 할 공과금이나 내가 갖고 있는 자산에 대해 골몰하지 않는다. 나는 오래된 영화를 언제까지고 돌려보듯 같이 걷던 사람들과 같이 걷던 거리를 다시 걷는다. 하늘은 흐리거나 청명하고, 공기는 서늘하거나 후덥지근하다. 거리는 우리가 창조자인 도시의 거리처럼 우리밖에 없거나 언제나 북적이는 관광지처럼 행인이 많다. 건물은 모두 낮거나 모두 높다. 우리는 날씨와 음식에 대해 얘기하거나 과거 겪었던 상처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혹은 이상하지만 웃기다고 할 만한 경험을 들려준다. ‘좀 걸을까요.’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다시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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