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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Oct 05. 2023

날카로운 첫 배변의 추억

후회는 없다. 변기 위에서 까무러칠지라도.

다시 눈이 떠진 시각은 새벽 세 시, 또 얼마나 큰 고통이 덮쳐올까,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멀어져라 현실아. 흩어져라 의식아. 오히려 맑아지는 정신에 자포자기하며 눈을 떴는데 어라? 이상했다. 그토록 선명하고 집요하게 뒤를 붙잡고 늘어지던 통증이 그새 희미해져 있었다. 아아. 죽으란 법은 없구나. 들숨에 평화, 날숨에 감사를 되뇌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거의 두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깨긴 했지만 매번 조금씩 더 가벼워진 통증을 인지하며 행복하게 잠을 청했다. 게임 속에서 캐릭터가 잠을 잘 때마다 HP가 회복되던 설정이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잠의 회복력이란 정말이지 엄청나구나. 마침내 아침이 밝았을 땐, 통증은 사라지고 정신은 또렷했다.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꿔보았다. 각도 조절에 실패하는 순간 바로 자극이 왔지만, 누가 동구에서 쥐불놀이를 하는 것 같던 간밤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수술의 공포와 극심한 통증도 지나갔다. 이제 회복을 위한 단 하나의 관문이 남았다. 첫 배변. 치칠수술 후 첫 배변의 무시무시한 고통은 전설 속 드래곤처럼 치질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왔다.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가 없기에 자꾸만 확대재생산되는 미지의 공포. 겪어보기 전엔 들어본 적도 없는 수술 첫날밤의 고통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데, 경험자들이 입을 모아 외치던 수술 후 첫 배변의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무섭다. 정말이지 무서워 죽을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술 당일(D-day)과 다음날(D+1)은 변의가 없었다. D+1일 오전, 병원에 가서 수술 부위를 보이고 거즈를 교체하며 의사에게 물었다.

"쌤, 혹시 일주일 동안 안 먹고 안 싸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안다. 알면서 물어봤다. 혹시나 될까 싶었다.



병원에서 챙겨준 식이섬유 한 박스와 복용약, 추가로 처방받은 진통제까지 바리바리 챙겨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약 봉지를 읽으며 간을 보았다. 제산제는 꼭 먹어야겠다. 변이 무르게 나와야 좀 덜 아플 테니까. 위장운동촉진제는 안 먹으면 안 될까? 너무 자주 마려운 건 싫은데. 추가 진통제를 먹을 일이 있을까? 복용약에 이미 해열진통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이런 건방진 생각을 우리는 <사망 플래그>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생각할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을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지니 이번엔 동구에 대어놓은 거즈가 거슬렸다. 소변볼 때마다 여간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다. 게다가 갑자기 급똥 신호라도 오면 그땐 어쩔텐가. 떼어내야겠다. 그런데...어떻게 떼어낸담? 양 둔부에서 시작해 엉덩이골에서 하나가 되는 Y자 모양의 의료용 테이프, 섣불리 잡아당기면 동구가 당겨진다. 누군가 거들어주면 수월하겠지만, 죽어도 남편한테 도와달라기는 싫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듯한 아픔을 삼키며 겨우겨우 뜯어냈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듯한 아픔? 그런 말은 그냥 비유에 불과하다. 실제로 잘려나간 동구가 읍소하는 고통에 비하면 뜯길 거 '같은' 아픔이 대수랴.


동구도 열어뒀겠다, 이제 언제 신호가 와도 달려갈 수 있다. 안심하고 흰죽으로 수술 후 첫 끼니를 해결했다. 첫 배변을 대비해 간밤의 7꾹 이후 무통 주사도 아껴둔 상태다. 제발 첫 배변까지 무통약이 남아있기를. 물풍선이 줄어들 때마다 수명도 줄어드는 것 같다. 

금쪽 같은 내 포션


D+2일 새벽과 아침 사이, 어스름한 시각에 눈이 떠졌다. 정확하게는 변의가 잠을 깨운 것이다. 머리맡에 두고 잔 식이섬유 네 포를 허겁지겁 물과 함께 삼키고 비장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무통 주사는 진작에 눌러두었다. 조심스럽게 변기에 앉았다. 분명 당장이라도 나올 것 같았는데, 쉽지가 않다. 아픔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막막하다. 살면서 이렇게 막막했던 적이 있던가.


진퇴양난. 머금고 있어도 아프지만, 밀어내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기절할 것처럼 아프다. 변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단단한 물질이었나. 약도 꼬박꼬박 먹었고, 식이섬유도 제때 챙겨먹었고, 물도 많이 마셨고, 종일 흰죽만 먹었는데,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몇 번을 앉았다 일어선 끝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 왔다. 힘을 주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곧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사지가 벌벌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쇠 깎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귓속을 휘젓는가 싶더니 곧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됐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일시정지.


세상에 이런 강도의 아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이제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아무런 판단이 서질 않는다. 혹시 방금 싸버린 게 뇌는 아닐까. 어떻게 방에 돌아와 누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상의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고, 하의는 상상에 맡기겠다. 누운 자리가 푹 젖어들어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세상엔 나와 통증만 존재한다.


"치질이 심했어요." 수술을 마친 의사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돈다.

그러니까 그건 곧, 통증도 심할 거라는 친절한 암시였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하긴, 먼저 알았대도 별 수 없다. 아플만큼 아프고 나면 비로소 안식이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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