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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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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n 30. 2020

형제는 서로의 보호자가 아니다

"형아! 작게 좀 말하라고!"

<아이들끼리는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첫째가 1학년을 마칠 때까지 쭉 지켜온 나의 철칙이다.


작년 한해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놀이터붙박이였다. 놀이터붙박이로 지내다보면 보인다. 놀이터는 기본적으로 놀러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잘 놀고 있는 아이들은 당연한 놀이터의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놀이터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들은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들이다. 누가 누구를 따돌린다기보다는 그 아이가 끼었다하면 자꾸 분란이 나서 친구들이 놀이에 끼워주기를 꺼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아이들 중에서도 A는 특히 두드러졌다. A는 늘 혼자 나와 놀았는데, 시샘이 많고 상대의 감정보다 본인의 감정을 압도적으로 우선시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좋아해서 꼭 누군가를 독차지하려 했고 그러다보니 또래아이들과 큰 소리가 나기 일쑤였다. 상대의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옷을 찢거나 상해를 가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대부분의 아이들과 아이엄마들이 A를 꺼려했다. 그래도 A는 다음날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꿋꿋하게 혼자 놀이터에 나왔고, 자신을 피하는 친구들과 날선 어른들의 반응에 그대로 노출될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A의 말을 들어주고 아이들 사이를 중재해보려고 몇 번 나서보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더 A는 복합적인 아이였다. 고작 여덟살짜리와의 대화에서 상당한 감정소모로 피로감을 느낀 뒤로는 나 또한 A에게는 단답이나 미소로만 답하게 됐다. 괜히 A와 엮임으로써 안 그래도 많은 시선을 받는 내 아들에게 더해질 시선을 차단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A에게 나는 딱, 그 정도 마음이였던 거다. 내 아이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해줄 수 있는 친구엄마. 누구도 A에게 그 이상의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누구 하나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는 곳에서 A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주변과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게 참 싫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아이가 모르는 엄마들의 따가운 시선에 노출되고 그것을 피부로 받아내면서도, 속도 없는 것처럼 매일같이 놀이터에 나와 날이 갈수록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는 것.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A와 우리 아이가 크게 다를 바 없었기에 내가 느끼는 불안은 더 컸다. 언젠가 아이가 친구들과 아무 분란없이 세시간이고 네시간이고 놀 수 있을 때, 그 때까지는 내 시야가 닿는 곳에서만 놀게 하겠다고 나는 다짐을 굳혔다.


오후 두시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학교에서의 고행을 참아낸 데 대한 보상으로 매일같이 놀이터에서 놀다 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한번 놀았다하면 세시간은 기본이어서 나는 늘상 물과 휴지, 읽을 책을 챙겨 아이를 따라나섰다. 나는 잠시라도 내가 없는 곳에 아이를 혼자 두지 않았다. 놀다가 중간에 동생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아이와 함께 동생을 데리러 갔다가 다시 놀이터로 오는 번거로움쯤은 기꺼이 감수했다. 아이도 내 불안을 아는 것처럼 한창 신나게 놀다가도 내가 동생을 데리러 가자고 하면 군말없이 뒤를 따랐다.


2학년 때는 또 얼마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려나, 개학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던 어느 날 나의 소소한 두려움을 비웃으며 코로나가 우리를 덮쳤다. 첫째와 둘째, 아이아빠까지 온종일 집에서 엎치락뒤치락했고 나는 세 남자의 뒤치닥거리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둘이서 잘 노니까 다행이다, 동생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흐뭇해하던 것도 잠시. 집안의 끊이지 않는 온기가 지긋지긋해졌다. 아, 혼자 있고 싶다. 청소기도 시원스레 밀고 혼자 라면도 끓여먹고 노트북 두들겨가며 비생산적인 글도 좀 쓰고 싶다!!!


그렇게 자유를 꿈꾸다보니 어느덧 4월이 되었고, 여전히 아이들은 집에서 뒹굴었지만 우리집 뒷산 개울에 내내 웅크리고 있던 생명들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소금쟁이, 장구애비, 올챙이, 도롱뇽, 가재...매일같이 모습을 보이는 냇가생물에 한껏 흥분한 아이들은 내내 채집통과 채집망을 들고 산에 살았다. 집 뒷베란다에서 내다보면 산길을 통해 냇가로 왔다갔다하는 아이들 모습이 훤히 보였고, 산에는 지나다니는 또래아이들도 없었기에 분란이 날 걱정도 없었다. 나는 안심하고 아이들을 내보냈다.

가재
개구리
도롱뇽

아이들이 신나게 가재를 잡았다 풀어줬다 할 동안 나는 신나게 청소기를 돌리고 라면을 끓여먹고 글을 썼다. 한참만에 돌아온 아이들의 신발과 양말, 바지는 진흙에 담갔다 뺀 것 같이 처참한 꼬라지였지만 나는 조금도 꼬라지가 나지 않았다. 잠시 아이들과 떨어져있을 수 있다면야 이깟 물놀이 뒷설거지쯤이야.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터널 중간중간에도 빛은 있구나. 이 정도로 숨통을 트여준다면 비상시국도 버틸 만 했다.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지나고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인데도 넋을 놓고 있다가,

일이 닥친 후에야 내 발등을 찍고 싶어질만큼 후회스럽게 만드는 돌발상황들.


산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집 앞 놀이터를 거쳐야 한다. 날이 따뜻해지자 놀이터엔 아이들이 나와 놀기 시작했고 아이엄마들도 아이를 따라나와 놀이터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리집 아이들 역시 종종 집으로 들어오다가 놀이터에서 멈칫멈칫 발걸음을 늦추는 날들이 많아졌다. 놀이터에 나와있는 엄마들 대부분이 인사하고 지내는 이웃주민들이었기에, 또 첫째는 유독 인사를 잘 하는 편이라, 다들 맘씨 좋게 먹을 것도 나눠주고 놀이감도 나눠주며 함께 놀게 두는 듯 했다. 나는 그만 마음을 놓아버렸다. 늘 그렇듯 마음을 놓았을 때, 사건은 터진다.


왜요? 왜 제가 버릇이 없는데요?

첫째의 목소리였다. 청소기를 돌리다가 이상한 낌새에 뒷베란다 창문으로 향했을 땐 이미 감정섞인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나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 한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 등 뒤로 계속 첫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 아줌마가 나보고 버릇없대! 저 아줌마가 훨씬 더 버릇없어!"

마음이 급했다. 입으로 심장이 쏟아져나올 것처럼 울렁거렸다. 뒤이어 둘째의 목소리도 들렸다.

"형아, 작게 말해."

"저 아줌마가 먼저 나한테 버릇없다고 했어! 저 아줌마가 훨씬훨씬 버릇없어!"

"아 형아 제발 좀 작게 말하라고!"

버럭 높아진 둘째의 목소리에 다급함과 간절함이 실려있었다.


아무 옷이나 꿰어입고 허둥지둥 내려가는데 첫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영상통화였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불안해 제 아빠 전화를 쥐여 내려보낸 참이었다.

"엄마! 지금 놀이터인데 어떤 아줌마가 나보고 버릇없대!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나보고 버릇이 없대!"

"하라야. 하라야. 엄마가 지금 갈게. 하라야 아무 말 말고 조금만 기다려."

"저 아줌마가 더 버릇없어! 엄마 내가 지금 영상통화로 저 아줌마 보여줄게!"

"하라야! 하라야! 하지마. 하라야 그러지마. 엄마가 지금 내려갈게."


내려가니 첫째는 여전히 씨근덕거리고 있었고, 둘째는 형아와 아줌마 모두에게서 등을 돌리고 개미를 찾는답시고 쪼그려앉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눈엔 보였다. 한껏 긴장한 둘째의 뒤통수가 온통 제 형아에게로 향해있는 게.


"하라야, 산에서만 놀다가 바로 들어오라고 했잖아. 왜 너네끼리 놀이터에서 놀고 있어."

"놀이터에서 곤충 잡으려고 했어. 근데 저 아줌마가 나보고 버릇없대."

"하라야,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 기분은 나쁘겠지만 나중에 엄마랑 다시 얘기하자. 엄마는 네가 버릇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은 다 다르니까 생각도 다를 수 있어."

흘깃 얼굴을 보니 가물가물하지만 아는 얼굴이였다. 그이도 우리 아이들 또래의 아들 둘을 둔 엄마라 오매가매 지나치면서 '남자아이들치고 참 얌전하게 엄마를 따라가네'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나는 첫째를 다독이고 둘째를 챙겨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아예 냇가에 자리를 펴고 앉자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재잡기에 열중했고 이내 대왕가재를 찾아냈다. 덕분에 첫째와 둘째는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었다. 아이들이 신나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아까의 일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냇가에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았다

집으로 돌아와 첫째는 혼자 씻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는 둘째를 데리고 안방화장실로 갔다. 둘째를 씻기며 자초지종을 물으니 자기는 개미를 잡느라 모르겠단다. 모르겠다면서도 그 입에서 술술 나오는 진술을 종합해보니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냇가에서 놀다가 지루해진 아이들은 놀이터로 내려왔다. 마침 놀이터에 또래남자아이 둘이 놀고 있었고, 불쑥 첫째가 함께 곤충을 잡자고 청했다. 첫째는 상대방이 대답하지 않으면 집요하게 계속 묻는다. 눈치껏 알아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보다못한 아이엄마가 "너 우리 애랑 놀지마."라고 선을 그었다. 기분이 상한 첫째는 반발심과 호기심을 반반 섞은 말투로 "왜요? 왜 놀면 안되는데요?"라고 물었고 그 말에 돌아온 대답이 "너 정말 버릇없다."였던 것이다.


무언가 본인에게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항상 '왜 안 되는지', '지금 안 되는거라면 나중에 언제 되는지', 엄마로부터 설명을 듣고 납득해왔던 첫째에게 날선 아줌마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는 무례한 것, 그야말로 자기보다 훨씬훨씬 더 버릇없는 것이었을 게다. 웃긴 건 그러고 나서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노는 그들에게 "저도 끼워주세요"라며 재차 다가갔고 "아니 우리끼리 할게."라는 아줌마의 대답에 아이는 또 "왜 안 끼워줘요? 좀 끼워주지."하며 그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는 것. 버릇도 버릇이지만 참 속도 없는 놈이다. 실소가 나왔다. 


그 일련의 상황들을 안 보는 척하며 귀로, 피부로 모두 흡수하고 있었을 눈치 빤한 둘째. 그에게는 무척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아. 아까 왜 형아한테 작게 말하라고 했어?"

형아를 말리던 둘째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 아줌마한테 다 들리니까."

"아줌마가 들으면 왜?"

"형아한테 또 뭐라고 하니까."

"그런데 형아한테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짜증을 내면서 말해. 네가 형아를 감싸줘야지."

"엄마. 이제 그만 얘기하고 싶어."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것을. 그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던 엄마를 대신해서 본능적으로 형아를 말렸던 둘째, 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을 둘째에게 나는 무슨 소리를 하고 만 걸까.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땅바닥의 개미를 쳐다보는 척 했지만 차마 형아를 떠나 혼자 집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던 동생. 내가 둘째에게 했어야 할 말은 '미안하다'라는 사과였다.


그 상황에 너와 형아만 세워둬서 미안해.

너는 형아의 보호자가 아니야.

엄마 대신 네가 형아를 보호하게 해서 미안해.


형과 동생은 대등하다. 형이 동생의 윗사람도 아니고 동생이 형의 아랫사람도 아니다. 고작 아홉살과 일곱살, 자기 몫만 해내도 기특할 나이다. 누가 누굴 챙긴단 말인가. 자발적으로 서로를 챙긴다면야 참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의지로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게다가 부모인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부모 자신의 의무를, 또 다른 자식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일 이후 나는 단 한번도 아이들을 저희들끼리 밖에 내놓지 않았다. 가끔 집안일로 바빠서 놀이터에 나가는 시간이 한없이 늦어지는 날은 첫째가 물어온다.

"엄마 우리끼리 나갔다 오면 안돼?"

"안돼, 동생도 아직 어리고 위험해."

"내가 동생 잘 챙겨서 데리고 올게."

"엄마가 너무 불안해서 안돼. 이따 엄마 일 끝나면 같이 나가자."

입을 비죽이며 돌아서는 첫째를 보며 혼자 생각한다.


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는 아직까지 엄마의 자유를 허락할 수가 없어. 잠깐의 자유를 욕심냈다가 네가 버릇없다는 말을 들었고, 동생이 눈치를 보게 만들었잖아. 엄마는 그날의 엄마를 용서할 수가 없어. 너희는 서로의 보호자가 아니야. 너희끼리 챙기지 않아도 돼. 아직까지는 엄마가 너희를 힘껏 챙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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