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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Nov 27. 2017

바라나시, 죽은 강물에서 사는 사람들.

갠지스강은 계속해서 흐른다.



해가 뜨기 전인 새벽 6시.

어젯밤, 오늘의 기상을 위해 꽤 일찍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조차 일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그것을 아침이라 부를 수 있을까.


희부연 안개는 이 도시를 더 신비롭게 만든다. 눅눅하고 텁텁한 냄새가 향신료 냄새와 함께 몰려왔다. 이곳에서 매일같이 맡았던 냄새였다.


한 치 앞만 보이는 안개를 뚫고 목욕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사람들이 몸을 담그고 나올 때마다 강은 철퍽철퍽 소리를 내고 있다. 한쪽에선 아낙내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강류를 따라 걷던 나는 발 옆을 쳐다본다.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강물은 탁하다 못해 검다.


‘이 물은 분명 죽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죽은 물 안에서 산 사람들이 삶의 죄를 고하며 계속해서 멱을 감았다. 갠지스 강물이었다.


가트에는 사람보다 소와 개가 더 많았다. 비루 오른 개들은 제 몸을 긁느라 한 번에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비쩍 마른 소들은 속도가 느려 자꾸만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발목을 넘기는 양말을 주워 신고 크록스를 신었다. 젠장, 물컹하다 했더니 또 소똥을 밟았다. 아니 개똥인가. 신경질적으로 길바닥에 발을 문질렀다.


바라나시에 도착하고 며칠간 나는 아팠다.

내 여행 중 가장 아픈 날이었다. 물 한 모금 먹기 힘들 만큼 배가 아팠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인지 위로도 아래로도 게워낼 것 조차 없었다.

아픈 도시가 나를 아프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내가 본 바라나시의 도시는 병든 느낌이었으니까.


삶과 죽음 중 죽음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 훨씬 많은 곳이었다. 윤회를 끊기 위해 바라나시 강물에 뿌려지길 원하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니 그 사람들의 업을 담은 이 도시는 병이 들었다.




해가 중천이지만, 바라나시의 겨울은 추웠다. 푸쉬카르에서 사 온 얇은 바지를 입기엔 바람이 쌀랑했다. 해가 중천이라 했지만, 그것은 시간적인 표현일 뿐 사실 해가 보이지 않는다. 바라나시는 낮도 우중충했다.


시내는 골목이 좁았고, 장을 보고 짜이를 마시고 물건을 팔고 릭샤를 끄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수많은 관광객까지 더해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인도인들은 릭샤릭샤, 마리화나, 헤이 마이 프렌드, 오- 칭구칭구, 등을 외치며 나를 귀찮게 했지만 그뿐이었다. 불쾌한 내 표정에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섰다.


한국으로 커리를 사 가고 싶다던 일행을 따라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인도에서 먹었던 커리는 단 한 번도 입에 맞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에 나도 하나 구매하려 했지만, 막상 사고자 하니 어찌 먹어야 할지 덜컥 걱정이 들었다. 게다가 이것저것 냄새를 맡다 보니 향신료에 취해 더욱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실 3분 카레가 우리에겐 제일이었다.




일몰시간, 나는 화장터로 갔다.


이 도시는 삶과 죽음이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죽음을 맞은 사람의 시체를 태워 강으로 보냈고, 그 옆으론 산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빨래를 하고 멱을 감았다. 정신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도시로 매일매일 구원을 받기 위한 시체들이 운구된다. 이곳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웠고, 나는 그것이 무서웠다.


화장터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을 재로 만들기 위해 그곳에선 매일, 매 순간 장작이 타고 있다. 한 인간의 인생과 긴 세월을 품은 육신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다. 타는 시신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주변을 뱅뱅 돌며 뛰어놀기까지 했고, 염소들은 먹을 게 있나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내가 보는 화장터가 과연 죽음일까, 삶일까. 나는 그 이어진 선 사이에 서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시체를 태우는 장작은 가격마다 종류가 다르다. 싸구려 장작으로 싸게 태운 시신은 다 태워지지 못한 채 갠지스 강물로 보내졌다. 제대로, 빠르게, 깔끔하게 죽는데도 돈이 드는 세상이다. 삶이라는 것은 참 힘겹고 고되지만, 죽는 것 또한 만만치가 않네. 타는 시신을 바라보며 나는 이 따위 혼잣말이나 되네였다.


"람 람 샤따헤이, 람 람 샤따헤이."


라마신은 알고 계신단다. 무엇을? 냉조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냉소벽(冷笑癖)이 있었다. 이런 내가 부끄러웠던 곳은 아마 바라나시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종교에 특히나 냉소적이다.


이 생, 노후, 내년도 아니고 당장 지금 행복하자란 마인드로 살아가는 나는 다음 생에 내가 무엇이 될지에 관심이 없고, 내가 잘한 일에 “오! 주님 감사합니다.”하며 나 외에 다른 무엇에게 감사할 생각도 없다. 그런 연유로, 다음 생에 형편없는 무언가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사실 그다지 무섭지 않다. 나는 지금 베풀고 지금 행복하게 살다 보면 내가 태어나기 전 아무것도 아니었 듯, 죽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게 너무 당연한 이과생이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강한 믿음으로 인해 편견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그것이 내가 종교에 특히나 냉소적이게 된 이유이기도 했는데, 따지고 보니 종교라는 것도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나 역시 괜한 편견을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성경을 믿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은 이 생에 나를 굉장히 평온하게 할 것이고, 윤회사상을 믿어 모든 생명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 생에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모든 종교는 성스럽고,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순수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믿음으로 누굴 살리네 죽이네 하며 전쟁까지 일어나는 지구에서 살다 보니 나는 종교가 가진 힘을 엄청나게 무서워했다.

그리고 바라나시에서 느낀 종교의 힘 역시 꽤나 무서웠다.


힌두신화에는 인도 인구만큼이나 많은 신이 존재한다고 했다. 인도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한다면 그들은 어쩌면 "그럽시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비록 예수'만' 믿지는 않겠지만. 그들에게 종교는 그저 삶이었고,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인도 비자를 신청할 때 종교를 선택하는 칸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 날 위한 선택지인 '무교'는 없었다. 이곳에서 종교의 선택은 자유롭지만, 종교의 유무에는 자유가 없는 셈이었다. (아무래도 힌두교에 지식이 없던 나는 "비자 안 나오면 어떡하지?"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별 수 없이 크리스천을 선택했다.)





배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나갔을 때 나는 디아(갠지스 강물에 소원을 빌며 띄우는 꽃초)를 띄웠다. 강바람에 불씨가 꺼질까 두려워 양손으로 곱게 잡아 놓는데 결국은 손등이 물에 닿고 말았다. 피부병이라도 걸릴세라 화들짝 놀라 짧은 탄성과 함께 손을 털어 올렸다. 그 사이 내 소원을 품은 디아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삶이 끝나는 곳에 소원을 띄운다라.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왠지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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