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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영 Nov 19. 2018

비난의 말을 들었다.

남들의 비난에 맞서기

상대의 비난의 말이 화살촉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을 때 나는 이것을 어떻게 빼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당황, 공포, 분노라는 감정이 내 마음을 잔뜩 어지럽히다가 그 감정들이 점차 침전되고, 상처만이 그 자리에 남는 것을 그저 지켜본다. 그리고 내 가슴에 남아있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말없이 고통을 감내할 뿐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비난의 말로부터 숨을 도피처가 있다. 바로 이곳 내가 사는 집이다. 여기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 누구도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질 수 없다. 자연과 동물은 결코 나를 비난하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상처를 주기는커녕 언제나 명랑한 나의 아이들은 기꺼이 나에게 다가와 내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육복이가 아장아장 낙엽 위를 걷는다. 요즘은 이 아이들을 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된다.


개들의 공감능력은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증명되어 왔다. 개들이 사람 아이에 비해 주인의 감정에 더 잘 반응한다라는 연구 결과 또한 이를 반영한다. 주인이 울고 있을 때, 사람 아이는 그것에 별로 반응을 안 하는 반면 개들은 주인 주위를 맴돌거나 가까이 기대어 앉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개들의 부드러운 털과 깊은 눈망울, 그리고 거기에 따스한 온기가 더해지면 그 보다 더 좋은 위로 상대가 없다.


하지만 나의 개들은 이런 감수성 높은 개들과는 좀 다르다. 내가 실의에 빠져있어도 서로 장난치고 노느라고 정신이 없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짓게 되는 것으로 아이들의 위로는 끝이 난다. 또는 내가 슬픔에 빠져 누워있으면 내 슬픔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나를 밟고 뛰어 노느라 정신이 없다. 나를 밟을 때마다 “아프다~ 엄마 아프다~”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당최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발길질로부터 이리 저리 도망 다니다 보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슬픔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소복이가 내 베개를 다 차지하고선 아무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누워있다. 조금만 옆으로 가 달라고 사정해도 눈하나 깜짝을 안한다. 눈에 무관심이라고 써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 앉아 무릎 위에 다복이를 앉히고 글을 쓰는 것도 나에게 위안이 되는 행위이다. 보통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조금은 치유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데 서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글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다 보면 마법처럼 상처는 더 이상 나를 쿡쿡 찌르지 않게 된다. 이런 마법의 힘에 이끌려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써 왔던 건지도 모른다.


제일 작은 다복이가 산책을 하다말고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려고 뒤돌아 보고 있다.


상대가 어떤 이유에서건 나에게 비난의 말을 한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을 떠나 잘못된 행위이다.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퍼 붙는 행동에 불가하다. 이런 일들은 내 집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면 허다하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아이들을 떠올리고, 나의 집을, 내 방 침대를 떠올린다. 나는 이렇게 갈 곳도 있고, 나를 반겨주는 19마리의 아이들도 있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 나를 아무리 공격해도 끄떡없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자연은 그 존재 자체로 위안이 되어 준다. 찬란한 햇빛을 받은 나무들이 나를 감싸안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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