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겁이나 걱정으로 밤을 새우며 동네 정형외과를 검색해 찾아본 후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이렇게 큰 병원이 동네에 있었나
맨날 빵 사 먹으러 들락거렸던 베이커리 위층의 커다란 병원 간판이 나를 부른다
어서 와 정형외과는 처음이지?
병원에 들어서니 괜히 더 아픈 것 같은 다리를 절뚝이며 접수를 하고 기다리니 곧 이름을 부른다
'아.. 무섭다. 당분간 달리기를 하지 말라고 하면 어쩌지ㅜ'
어디가 불편하냐는 질문에 기어가는 목소리로 증상을 말했다
"어제 마라톤 도중부터 다리가..."
엑스레이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지난밤 검색으로 알게 된 다양한 무릎 통증과 염증의 병명들이 복잡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중 해당되는 내용이 있을까
당장 2주 후에 다시 대회가 있는데 뛰지 말라고 하면 어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들으러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결과는 심플했다
"별 이상 없습니다
일주일 찜질하고 쉬면 다음 주는 다시 운동해도 됩니다"
"정말요?"
"어제 송도 마라톤 뛰셨나 봐요?"
역시 질병이 아닌 꾀병에 가까웠나 보다
이상이 없다는 그 한마디로 이미 다 나은 기분에 한결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그런데 이 대회가 동네 정형외과 선생님도 아실 만큼 유명한 대회였던가
제가 그 대회의 풀코스에서 거의 꼴찌에 가깝게 완주에 성공한 1인이랍니다
내 입장에선 다리를 접지도 못할 엄청난 통증이었지만 질병 수준은 아니라 하고 물리치료도 받았으나다시 오란 얘기도 없었으며 간단히 진통제 약 처방만을 받아다행이다 싶었다
통증도 학습이라면 이번에 잘 배워뒀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나를 다독이고 끝까지 달려 피니시 라인을 넘을 수 있도록 경험의 밑천으로 삼아야겠다
풀코스 다섯 번 도전에 네 번의 성공과 한 번의 실패 끝에 얻은 인증과도 같은 근육통을 달고 지난 대회의 이야기를 되짚어 본다
공주 마라톤 완주 실패 후 3주 만에 만회의 길이 열렸다
2019 송도 국제 마라톤 대회
송도에서 10km 달리기 대회를 달려본 적이 있는데 이번 대회에 당시의 코스 일부가 포함된다는 소식에 당시 그늘 없는 땡볕 아래에서 숨이 꼴 딱 꼴 딱 넘어가던 기억이 되살아나 살짝 망설여지긴 했지만 달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덜컥 풀코스에 신청을 해버렸다
지난 마라톤 완주 실패 후 매주 세 번 정도 10km씩 달리며 컨디션 조절을 했다
당시 후회가 깊었기 때문에 이번엔 꼭 완주하겠다고 의지를 다졌으나 코스를 보아하니 이번 역시 내 마음처럼 쉽진 않을 듯하다
뚝딱 잘 뛰어버리면 문제없겠지만 뒤가 약한 내 입장에서 중반 이후 코스 별 제한시간이 마음에 걸렸다
강제로 낙오자 차량에 탑승되는 일 없도록 제한 시간을 기억에 눌러 담고 출발선상에 섰다
풀코스 참가 인원이 적어 하프 참가자들과 함께 출발됐다
첫 3km를 채 못 가 첫 번째 반환점이 나오기 때문에 뒤이어 출발한 주자들과 반대방향에서 달리며 바라보니 전체 참가 인원이 적다기보단 장거리의 인기가 없나 보다 싶었다
하긴 9월 말이라도 낮 기온이 높고 볼거리도 그늘도 없는 아스팔트 땡볕인데 이 길을 달리고 싶을 리가 없지
(배번표를 받고 번호의 조합을 보면서 풀코스의 참가자가 굉장히 적을 것 같단 예상은 했었다)
일단 지난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포기는 없다'라는 의지로 완주를 목표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시작 후 5km까지는 컨디션이 좋아 제법 달리며 뒤처지지 않고 붙었지만 이 페이스로는 15km도 유지가 힘들 것 같아 속도를 떨어드리며 스스로 장거리 대비 모드에 들어간다
8km 지점에서 파워젤을 미리 먹어두고 10km 급수대에 도착해 처음으로 물을 마셨다
지금까진 달리기 도중 화장실에 갔던 적이 없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미리 봐 뒀던 공원의 깨끗한 화장실에 들르게 됐다
대회 시작 전 미리 다녀오고 싶었지만 대회장 가까이에는 오픈된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
가까운 건물이 잠겼거나 먼 건물로 다녀와야 했는데 당시 급했던 것은 아니지만 5시간 가까이 달릴 생각을 하니 이 때는 조바심이 들어 사정이 괜찮은 초반에 미리 다녀오고 싶었다
그사이 잠시 지체된 정도를 감안하더라도 15km 지점까지는 다시 회복해 앞서 함께 달리던 러너들을 따라잡았고 15, 16, 17km를 꽤 무난하게 달린 후 하프 코스 주자들과 헤어지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됐다
중도에 돌아가고 싶다면 여기가 마지막 갈림길이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더 먼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쾌감이 느껴졌다
가자, 이번엔 실패 없이!
마음은 충만했지만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코스에 접어드는 순간 땡볕 지옥이 펼쳐졌다
'이게 뭐여'
그늘도 없고 의지해 달릴 주자도 없는 그저 내리쬐는 아스팔트 길바닥이었다
여기로부터 한 25km는 남지 않았나
잽싸게 돌아서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들긴 했지만 만약 이번에도 돌아선다면 당분간 풀코스 도전 자체를 꺼리게 될 것 같아 계획을 수정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원래의 목표는'4시간 50분 안에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는 것'이었지만 일단은 완주를 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에 최소의 목표를 두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 코스 제한이 35km였으니 어떻게든 거기까지만 통과해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대회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았는데 '국제'라는 타이틀이 붙은 대회라기엔 민망할 만큼 진행이 꽤 엉성했고 특히 주로 상에 물이 크게 부족했다
스펀지가 부족하니 스펀지 제공 테이블에서 물을 대신 제공했고 그나마도 나중엔 다 떨어져 테이블이 철수했거나 간신히 도착한 급수대에 물이 없어 "2.5km만 더 가시면 맛있는 물이 있어요"라는 황당한 안내를 받아야 했다
(그마저도 실제 물은 그보다 1km를 더 지난 3.5km 지점에 있었다)
물이 없었던 곳은 앞의 그곳뿐 아니라 물 혹은 스펀지가 제공되기로 되어있었던 곳의 세 군데 정도에서 다 떨어졌다는 얘길 들어야 했다
이쯤 되니 슬금슬금 생각나는 얼음을 동동 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ㅜㅜ!!
힘겹게 풀코스 반환점에 도착했지만 타임 체크조차 없다
대회가 생각보다 성의 없이 치러지고 있단 생각을 하며 엉금엉금 다시 되돌아가는 송도 4교에 올라서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대회 시작 후 처음으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회 중임에도 앞에 주자가 없다
다리를 올라가면서부터 문제의 무릎 통증이 시작됐다
정확히는 무릎 옆에서 뒷부분으로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다리가 접히지 않았다
마치 모서리에 팔 뒤꿈치를 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지잉하는 전기 오르는 느낌의 통증과 흡사했다
제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주자들은 이미 다 지나갔고 완주를 목표로 달리는 소수의 주자들만 길에 남은 상황에서 이 다리로 시간과 상관없이 완주를 하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달리고 있는데 다리 위에 서있는 앰뷸런스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내리고 다른 사람이 타는 광경이었는데 차에서 내린 여성분이 내쪽으로 걸어와 여기가 몇 키로쯤이냐고 물었다
다리 아래서 26km를 막 지났으니까 27에서 28km 사이일 거라고 대답했는데 엄청 어이없어하며 본인이 28km 지점에서 러닝을 포기하고 앰뷸런스를 탔다, 그런데 뒤로 되돌아와서 다른 사람을 태우고 이 지점에 본인을 내려놨다는 내가 방금 목격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게 아닌가
"네?"
그쪽 사람이 더 급했나 보다고 위로를 하고 다시 차를 타려 해도 일단 다리를 내려가야 하니 걷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힘 내시라고 생명수나 다름없던 파워젤을 나눠드리고 헤어졌다
나도 뛸 수 있는 다리는 아니었지만 35km까지는 어떻게든 시간 안에 가야 하니 걸음이 급했다
(다리를 내려가고 얼마 안가 28km 안내 표지를 보니 위에서 만난 분이 생각나기도 했다)
여기부터 35km까지는 무슨 정신으로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땀이 마른 피부 위로 하얗게 자국이 생기고 그 위로 또 땀이 흐른다
간신히 달려가 보면 물이 떨어졌다며 테이블을 정리하는 상황에 짜증이 났다
이럴 거면 대회를 열지 마!!!!
한강 공원 대회 때도 물이 없어 공원 수돗물 퍼마신 생각이 나서 헛웃음이 났다
웃긴 생각을 했더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해 그 힘으로 얼마간 또 달려갔다
35km를 통과하면서 진짜 무서운 것도 봐버렸는데 일명 <낙오자 버스>
뒤로 따라오면서 태워가는가 보다 싶어 있는 힘껏 달려 도망쳤다
도망치다 힘이 빠지면 걷고 그러다 정신이 들면 또 달리다 39km 지점부턴 교통 통제가 풀려 인도로 마지막까지 천천히 걷다 뛰다 하며 들어갔다
5시간 안에 들어가긴 틀렸고 뭐 다 철수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간간히 마지막까지 뛰는 주자들이 보여 거기에 묻어가며 의지 삼아 되돌아왔고 드디어 긴 여정을 마치고 피니시 라인을 통과
5시간 7분 만에 러닝을 끝냈다
그 7분을 못 참아서 ㅜㅜ
남성 완주자는 393명, 여성 완주자는 31명이었고
나는 31명 중 25번째로 들어왔다고 한다
메달은 당당히 받아왔다.. 가 아니라 언제나처럼 지급되는 간식 주머니 안에 들어있었다
(소보로빵 하나랑 생수 한 병, 메달이 담긴 참으로 소박한 비닐봉지)
달리기가 끝난 직후부터 긴장이 풀린 내 다리는 더 버티지를 못했고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신발에 쓸렸는지 발가락에 커다란 물집도 하나 올라와 있었지만 하고 싶은 걸 했다고 생각하니 후회는 없었다
다만 지난 대회부터 오래 달리고 나면 비슷한 통증이 느껴져 병원은 꼭 가보기로 하고 다음날 눈뜨자마자 걱정을 한가득 안고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별 이상 없습니다
일주일 찜질하고 쉬면 다음 주는 다시 운동해도 됩니다"
이 한 마디가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다리가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무리한 운동에서 오는 통증이고 내가 걱정했던 그 어떤 병명도 내 다리엔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느리긴 해도 건강하고 소중한 내 다리
대회 후 4일 차가 되니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고 나는 다음 달리기를 준비하고 있다
다행히 다음 주는 하프코스의 달리기라 정상적인 시간 안에 다른 사람들처럼 들어올 수 있어 부담이 적다
이번에 달리며 고민을 했던 것은 내가 풀코스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좋아해서 무작정 덤비고 있지만 늘 5시간 안팎으로 나오는 시간이 마음에 걸렸다
가뜩이나 참가자도 적은데 나처럼 길에 오래 남아있는 주자들을 위해 행사가 유지되는 게 비효율적이진 않을까
나는 과연 물도 아까운 낙오자에 불과한 걸까
느릿느릿 들어오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저렇게 5시간 다 쓰고 들어오면 오히려 힘들다, 3시간 뛴 사람들은 들어와서도 기운이 남아서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