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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영 Jan 18. 2023

내 존재의 쓸모와 안부를 묻는 밤

한주가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다 지난 것처럼 긴 나날이다. 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던 일을 못하게 되니 나는 참 유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는 날이다. 이유에 반하는 이유를 들이밀면 나는 무용한 사람이 되어 흩어진다.


일에서 내 쓸모는 없을지라도 나는 개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다시 몸을 추슬러 움직인다. 내 효용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마음속에 깊이 묻어둔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엄마도 병원에 두고 나온다. 나는 내일 출근을 위해서 막차를 타야 하니까.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나의 안부를 묻는 이들에게 집에 잘 들어왔다는 전화를 돌린다. 고맙고 애썼다는 말을 듣는다. 전화를 끊고 나면 문득 내가 받는 칭찬은 내 죄책감에서 기인한 행위로부터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랬다. 짐이 될지 모른다는 죄책감을 내 어깨에, 등에, 머리 위에 짐처럼 지고 살았다.


고등학생 때, 사촌언니가 엄마와 나를 불러서 맛있는 중국집을 알았는데 사주고 싶다고 한 날이었다. 사촌언니가 시켜준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엄마의 자장면만 묽어졌다. 엄마가 산이 많이 나와서 그렇다는 말에 내 표정이 어둡게 변하자 언니가 말했다.

"혜영아 죄책감 갖지 마!"

나는 그 한마디에 자장면을 입에 물고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누군가 대신 알고 해준 말,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

"엄마는 자식이니까 당연히 해준 거야 너도 엄마가 아프면 당연히 해줄 거잖아 엄마는 부모니까 자식을 위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거야 네가 죄책감 가지라고 엄마가 너에게 잘해준 것이 아니야"


나는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맴돌고 있다. 그런데 내 죄책감은 아직도 그때보다는 적지만 여전히 마음 구석에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버리고 버려내도 다시 자리한 채로 새겨져 있다.


엄마가 아프다.

이번에는 내가 당연하게 병간호를 하고 있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간다. 그런데 내가 아픈 부모에게 가는 것에 대한 이유에는 자식이라는 당연함만 있는 것일까? 내 죄책감은 내 효도에서 과연 몇 프로를 차지하고 있을까? 70%? 80%?


엄마가 입원해 있으면 주말에 난 새벽 첫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막차를 타고 다시 집에 내려온다.

오빠 둘 중 한 명은 전화로 걱정을 대신하고 다른 한 명은 주말에 밀린 잠을 몰아 자고 밤에 잠깐 병원에 왔다 간다. 나는 당연하게 엄마에게 가지만 내가 와도 오빠들도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 엄마가 아들이 온다면 더 좋아할 텐데 하는 욕심이 생긴다.


두 가지 마음이 싸운다. 내가 하는 것만큼을 바라진 않아도 괜히 심통이 나고 괘씸하다.

“아들놈들 키워봐야 소용없다.” 오빠가 늦게 오거나 전화가 안 오면 엄마가 내게 하는 푸념소리가 들린다. 옆에서 난 맞장구를 치다가, 한편으로는 내가 많이 아파서 엄마와 보내는 모든 시간과 모든 사랑을 나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오빠들이 내가 매 순간 엄마 옆에 붙어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구나 여기며 이해해보려 한다. 그때 나를 보고 드는 생각은 ‘이건 형제에게 가진 죄책감이구나’ 싶었다.


내가 아파서 병원 생활을 많이 할 무렵, 오빠들은 초등학생이었다. 엄마와 동생이 없는 집에서 삼부자가 무척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한참 필요한 나이에 모든 관심과 사랑은 막내인 나에게 쏠려있는 것이 서러웠던 오빠들의 원망을 기억하고 가진 죄책감 말이다.


세월이 흘러 죄책감을 버리면 괘씸함이 남는다. 괘씸함을 버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남아야 맘 편히 살 수 있다. 엄마는 사랑을 남긴다. 아들이 오지 않아도 잠깐 왔다 가도 내가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모두 다 미안해한다. 엄마가 아파서 딸이 고생해서 미안하고 자식 바쁜데 아파서 미안해한다. 엄마는 당연함도 없고 죄책감도 없고 괘씸함도 없이 사랑만 남겨놓았다. 나는 그 무한한 사랑이 희생으로 보여서 또 짜증을 냈다. “내 걱정 오빠들 걱정하지 말고 엄마만 생각해!"


큰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네 엄마 너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냐"

내 존재가 조금은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큰엄마는 내가 입원해 있으면 항상 된장국과 누룽지 그리고 깨죽을 끓여다 주었다. 단 한 번도 “네가 아파서 엄마가 고생이 많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은 그 옆에 앉아있던 큰아빠였다.

"혜영아 너 커서 너네 엄마한테 꼭 잘해야 한다. 너의 머리털을 다 뽑아서 엄마 신을 만들어주어도 다 못 갚을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 알지?"


애한테 이상한 말을 한다고 큰엄마가 큰아빠를 구박하고 데리고 나간다. 과연 큰아빠만 한 소리겠나 그 나이 또래 아저씨 아줌마는 다 비슷한 소리들을 했다. 남이면 더 험한 말을 한다. 7가지 악에서 자식이 아픈 것은 죄라는 둥 어쩌는 둥 그런 소리를 아이에게 스스럼없이 하고 있으면 무척 당당하고 성깔 있는 우리 엄마는

“우리는 기독교라 해당 안 돼요! 그리고 애가 아프고 싶어서 아파요?! 내 자식이니까 내가 돌보는 것이 당연하죠!”하고 소리를 지르고 나를 데리고 가버린다. 그러면 그 무례한 누군가는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장닭이 날개를 펴서 자기 새끼를 보호하듯 하네~”


이런 내 위치가 엄마가 아픈 것으로 인해 승격되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 집에 저 딸만 안 태어났으면 걱정거리가 없었을 텐데..."에서

“저 딸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로 바뀌었다.

왜 엄마가 아프고 난 후 내 가치가 올라간 것인지 슬프고도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저 집은 딸이 아파 걱정시켜도 아들들은 사고 한번 안치고 잘 컸어 소리에서

“아들놈 다 필요 없다 키워봐야 소용없다”로 강등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나의 안부를 이렇게 묻는다.

"엄마 챙기는 것 중요하지만 너도 챙겨야 한다. 니 몸도 아픈데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엄마가 아프기 전에 내 아픔은 후자였다.

"고생하는 부모를 생각해서 아파도 티 내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야지 어서 털어내고 일어나야지"


나는 이제 환자에서 보호자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사람들에게 내가 들어왔던 소리를 그대로 주어만 바뀐 채 듣고 있다.

"딸 생각해서 잘 이겨내야지 딸이 고생하잖아"


나는 요즘 엄마가 들어왔던 소리를 듣는다.

"보호자가 고생이 많지 환자야 아프기만 하면 되는데 보호자는 챙길 것도 많고 네 몸도 꼭 돌봐야 한다"


모두 고마운 말이지만

모두 안부를 챙기는 말이지만

모두가 위로를 해주려고 하는 말일테지만

때로는 버겁게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씁쓸하게 들린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를 다 겪어서 모든 말을 다 들어보는 나에게는 무감각하게 다가오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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