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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영 Dec 22. 2022

자축 케이크는 품절

재발 없이 보낸 11년을 축하하며...

어제는

“나는 내리자마자 녹아버릴 거야!” 같은 비 같은 눈이 왔고 추운 날씨는 이런 눈을 금방 얼려버렸다.


오늘은 하루종일 눈이 내렸는데 특히 아침에는

“나는 절대 녹지 않고 포근하게 땅에 내려앉아 쌓일 거야!”같은 눈이 내렸다. 내리는 눈이 하얗게 쌓여 언 땅 위에 눈이 솜이불처럼 덮였다.


눈길을 헤치고 출근과 퇴근을 무사히 마쳤다. 이런 날씨에는 출퇴근만 지각 없이 잘해도 큰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추워서 꽁꽁 얼어붙은 몸을 조심조심 움직여 한발 한발 종종 거리며 가다 보면 어느새 일터에 도착한다. 숨을 고른 뒤 일을 한다.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일정보다 조금 더 미리 마감기한을 정한다. 일부러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면 현실을 조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정기검진 후 일정 기간 멍한 사람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까봐 미리 일을 해두려는 심산이다.


그래서 누가 빨리 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은 일을 나 혼자 온 신경을 집중해서 하고 돌아오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왜 이런 상태인 건가 생각해 봤다. 날씨의 영향도 있지만 오늘은 부정맥 시술 후 재발 없이 지낸 지 11년이 되는 날이었다. 난 항상 아기 낳은 아줌마들이 자식 생일 돌아오면 아프다는 맥락처럼 시술한 날이 돌아오면 괜히 아프다. 몸에서 자신이 고통스러웠던 날을 기억해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철새가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날을 어떻게든 행복하게 보내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내 두 번째 생일이라 맘대로 정한 후 항상 자축을 하는 것이었다. 가령 케이크를 사서 혼자 초를 분다거나 친구들을 만나 같이 초를 부는 식으로 조촐한 축하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눈이 와서 케이크를 사러 걸어가기 어려웠고 배달 어플로 근처 카페의 케이크를 주문하려 했더니 내가 먹고 싶은 맛의 케이크가 방금 팔려서 품절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크만 축하냐 뭐든 사야지 하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다. 책을 살까 옷을 살까 신발을 살까 괜히 이것저것 보다 이내 시들해졌다. 갖고 싶은 것이 없어서 사고 싶은 것이 없었다. 집 앞 카페에 지금이라도 걸어 나갈까 생각하다가 한 발짝도 더 움직일 힘이 없어 미리 해서 냉동실에 얼려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시간이 되어 연료를 보충해주는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고 있다가 문득 ‘11년 정도 되었으니 자축을 멈추어야 하나?’ 란 생각이 들었다. 뭐 대단한 기념일이라고 이걸 11년째 하고 있나 싶은 것이다. ‘이제 수술을 다시 하게 될 날도 머지않았을 텐데 뭐가 좋다고 축하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삐딱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고 그동안 해온 자축을 멈춘다면 괜찮아졌다는 감사함도 잊고 점점 나빠지고 있는 심장 상태만 더 걱정하는 맘만 커질 것 같았다. 괜히 케이크를 먹지 못해 부리는 심술이라 생각하고 축하는 하루만 뒤로 미루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내일 저녁에 엄마를 보러 가면 꼭 같이 케이크를 사서 축하를 하자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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