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게 묻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가장 최근의 일을 떠올리라고 하면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마무리한 공부라고 대답하겠지만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떠올리라 하니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것처럼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사실, 내가 받은 이 질문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내가 상대방에게 던졌던 가장 흔한 질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질문은 한 개인의 삶에 있어 하나의 큰 방점을 찍는 질문이었기에 절대 빠져서도 안 되고 빠질 수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요.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일, 가장 기뻤던 일 등 ‘가장’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는 그렇게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특별한 질문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니 내게 있어서도 기억에 남는 시간이 참 많습니다. 십대에는 혼자 비 오는 창밖을 쳐다보던 시간이나 다락방에서 혼자 책을 읽던 기억이 남아 있고, 친구들이 대학시험을 치르는 날 가정형편 때문에 시험을 보러가지 못하고 방 안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시간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십대에는 마당에 널어두었던 아이들의 하얀 천기저귀를 걷어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기저귀를 네모반듯하게 개어 쌓아두던 일도 기억에 남고,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가족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찌개를 데우고 또 데웠던 일이 기억납니다. 삼십대에는 시가 써지지 않아서 어느 요절한 시인의 묘에 찾아가 소주 한 잔 올리고 시를 잘 쓰게 도와달라고 애원했던 일도 기억나고, 등단한지 7년 만에 첫 번째 시집을 발간했을 때의 부끄러움과 기쁨이 묘하게 교차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정말 더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시어머니의 말씀입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던 나를 위해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대학부터 석사과정까지 모든 등록금을 내주셨는데 등록금을 줄때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사람공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주곤 하셨습니다. 정작 어머니는 당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는 분이셨지만 며느리가 하고 싶다는 공부를 위해 당신이 평생 모은 돈을 아낌없이 주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일은 너를 공부시킨 일”이라고 하셨던 그 말씀은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해도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잊히지 않을 것 같았던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히는 날이 많아지고 그 위로 새로운 경험과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시간은 바쁘게 흘러가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도 바쁘게 지나갑니다. 그래도 오늘처럼 이따금 가던 길을 멈추고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는 일은 우리의 삶에 또 다른 의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달리다가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잠시 멈춰 서서 기다려주는 것이지요. 오늘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떠올리는 것, 그것도 바쁜 삶을 미처 따라오지 못했던 내 영혼을 잠시 멈춰 서서 기다려주는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