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그리스에 한쪽 눈에 장애를 가진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죽기 전에 초상화를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이름 난 화가들을 불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려놓은 초상화들은 번번이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들을 불러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의 초상화는 대부분 두 부류의 그림으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눈에 장애를 가진 왕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었고, 또 하나는 두 눈 모두 장애가 없는 모습으로 표현한 그림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실적인 그림이긴 하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아픔이 느껴져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고, 두 번째는 명백히 거짓으로 그린 그림인 만큼 자신의 모습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이 어떤 그림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신하들의 고민은 커져갔습니다.
어느 날, 한 신하가 시골에 묻혀 산다는 화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그래도 유명한 화가로 알려져 있는 만큼 속는 셈 치고 그림을 그리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그림을 본 왕은 크게 기뻐하며 화가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 화가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장애가 없는 옆모습을 선택해서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장애를 일부러 감춘 것도 아니고 거짓으로 그린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보이는 면 중에서 보다 긍정적인 면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현재 보이는 모습만이 진실이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보이는 모습 중에서도 가장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해냅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긍정적인 모습들이 모였을 때 변화됩니다. 혹자는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눈에 장애를 입었지만 그는 세상을 바로 보는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 눈의 장애로 인해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우리의 시야를 더욱 좁게 만드는 경우가 많고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은 주변의 상황과 내가 가진 인식의 범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서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해 내는 것은 상대방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 시너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깨달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어두운 밤에 목이 말라 달게 마셨던 물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람의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구토를 할 만큼 역겹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려있다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세상의 사물은 그대로인데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갈수도 있고, 그렇게 본다면 모든 비극과 희극도 어쩌면 내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겠지요.
어두운 밤에는 그리도 고맙게 마셨던 물이 환한 곳에서 보는 순간 더러운 물로 변하게 되는 것, 처음부터 해골에 물이 담긴 것은 변함이 없으니 결국 변한 것은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내가 왜곡해서 인식하는 것들은 없는지 한번쯤 되돌아보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문제일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