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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10. 2022

283. 본다는 것에 대하여

눈에 관한 속담 중에는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지요. ‘견물생심 見物生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물건을 보면 없던 마음도 생겨난다는 뜻이지요. 인간에게는 많은 감각기관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시각은 다른 감각들에 비해 조금 특별한 위상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본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깊지 않았을 때는 그림을 그릴 때도 평면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점차 ‘본다’는 것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원근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원근법은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을 기준으로 선들이 그어지는데 그 선들이 수렴되는 한 곳이 바로 소실점입니다. 사물을 바라볼 때 눈은 모든 선들이 시작되는 중심이 되는 것이지요. 

시각, 즉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본다는 것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얕은 철학적 지식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본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잠시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상 대상의 전체를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보이는 앞부분만을 ‘인식’할 뿐이지요. 멀리서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여성도 가까이서 보면 그리 아름답지 않게 보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처음 만나는 여성을 아름답게 보고 싶다면 갖춰야 하는 선제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바로 학습입니다. 여성, 그중에서도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여성을 본 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아름다운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적당한 거리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이라 해도 그 여성의 얼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끔찍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땀구멍이 분화구처럼 보일 테니까요. 양떼가 노니는 초원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조금 떨어져서 보았을 때입니다. 실상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거긴 양떼의 분변으로 가득 차 있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돗자리를 펴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조건은 바로 ‘빛’입니다. 시각은 빛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대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서 빛은 신과 등가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의 뒤편에 후광이 비치는 것도, 신이 나타나면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빛이 비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의 기능 외에도 상당히 많은 것들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학습된 사유와 주위의 환경과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 등이 모두 갖춰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대상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갖춰지지 않았다면 인간의 시각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본다는 것도 그러할진대 나아가 대상을 ‘판단’까지 하려면 ‘비교대상’을 구하는 것부터 상당히 많은 학습조건들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텔레비전을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광고 이미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습과 빛과 거리가 완벽하게 갖춰져 대상을 식별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다른 체계에서 작동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 반드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대상을 판단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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