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 속에서 참가자들이 선택된 책을 읽고 마구 이야기를 한다. 책의 소재와 주제와 관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말이 서로 물리기도 한다. 맺음도 없이 말이 빙빙 돈다. 부정형의 무질서한 모임에서 나는 행복해진다. 어디에 내가 있든 이런 모임이 있다면 생존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겠다싶다. 낯선 곳으로 와서 적응하는 데에는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겠으나, 경제적 조건을 제외하면 나에게는 이런 작은 모임으로 충분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의식하지 않았는데, 이전에 살던 시골에서도 소모임 글 읽기/쓰기 모임이 있었다.
나에게 독서모임의 의미는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관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연관된다. 홀로 생활을 하면서 그 홀로가 완전 고립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다. 예전에는 일이 중요했다. 직업으로서 일을 통하여 타인, 지역과 소통해왔다. 그것 외에 다른 조건은 부차적이었다. 일을 통하여 나는 내 생존기반을 넓혀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일 속에서도 나는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접촉이 번잡한 곳, 사회관계에서 나는 소속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소속감을 낳는 정서적 유대감을 갖기 힘들어졌다. 피를 공유한 가족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혈연관계는 형제 가족이다. 그런데 난 그들과도 정서적 소속감이 아닌 형애화된 의무감만이 있다. 나에게 자식이 있거나 계약관계를 맺은 가족이 있다면 다른 상황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사람과의 관계가 넓어지지 않는다. 넓어지길 또한 원하지도 않는다. 한창 사회활동을 할 때는 관계를 넓히는 것, 나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책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런 관계 형성의 필요성이 내 생활에서 떠난 지 오래다. 나는 본래부터 집단적 성향보다는 개인주의적 리버럴한 성향이 강했나보다. 젊었을 때는 그런 성향이 약점인 듯하고, 고쳐야 할 점으로 이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성향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편했다. 그리고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했다. 그 성향을 타인에게 고집하지는 않지만 그 성향을 받아들여줄 수 있는 관계로 제한된다.
이런 나의 성향에 적합한 것이 독서모임이었다. 독서 모임을 통하여 정서적 유대감을 갖는 일이 다른 모임에 비해 조금 나을 수 있다. 이는 내 개인의 취향과 소망이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독서는 극히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활동이지만, 한발짝 나아가서 교류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서로 성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바로 책을 통해서, 관심을 나누고 알아갈 수 있다. 나에게 주는 혜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독서모임은 혀를 움직여 산 사람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말을 섞을 수 있다는 점, 내 이야기를 누군가 귀를 기울인다는 점, 서로 피드백을 한다는 시간만큼 귀한 시간이 있을까. 이런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고 서로 동료애를 느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둘째, 내 기억력에 대해서 나는 점점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 책을 읽어도 그 내용을 곧 잊는다. 집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집중력과 무관하게 내용을 깡그리 잊거나 다른 책 내용들이 들어와서 뒤죽박죽된다. 그런데 독서모임 회원들과 책을 이야기하면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설프게나마 이어진다. 기억의 저 밑, 늪 밑바닥에 빠져 있던 조각들이 끌어올려진다. 그리고 새롭게 집단으로 만들어진 기억을 이루는 이야기들이 생긴다. 이것들은 오래 가는 듯하다. 상호 기억과 지식을 보충해주는 자리가 되니 다행이다.
셋째, 독서 모임을 대비하여 책을 읽으면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다. 책을 읽는 데 부지런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치는 밑줄이 더 많아진다. 이렇게 내 머리를 조금 더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책 읽기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본격적인 내 글쓰기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처럼 독서모임을 통한 책읽기는 혼자 책을 읽는 것과 다른 효과를 낳는다. 혜택 중 또 다른 것은 내가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마음이다. 홀로이면서 고립되지 않은 생을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독서모임이다. -20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