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살던 지역, D면의 글쓰기 모임, 무쓰(무조건쓰기)가 해산되었단다. 얼마 후 나도 H읍 독서모임을 쉬기로 했다. 아직 이름도 갖지 못한 모임이었다. 무쓰는 내가 D을 떠나기 몇 달 전에 만들어졌다. 내가 그 곳을 떠난 후 그들은 제법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듯 했다. 나는 무쓰와 H모임을 왜 만들었을까? 회원 각각 자기 의미를 갖고 참여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몇몇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막연하지만 동기로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성실한 태도가 의심되어 모임이 필요했었다. 우리의 모임이 각각에게 꾸준함과 끈질김을 줄 것이다. 어쩌면 그 기대가 가장 큰 것이었는지 모른다. pleasure pressure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만들었다. pleasure guilty란 단어에서 힌트를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pressure makes pleasure라는 격언이 있었다. )
난 D에 있을 때부터 뜨문뜨문 일기를 써왔다. 일기의 글쓰기는 내가 쓰고 있는 인테넷 신문에 보내는 칼럼과 다르다. 칼럼은 나에게 글 쓰는 습관을 만들어주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글쓰기 소재가 달라지고, 글에 담고자 하는 것이 메시지가 아니라 내 흐르는 마음이길 바랬다. 그 마음이 말이 되어서 글이 되어서 나에게 오고, 누군가에게도 갔으면 싶었다. 그런 바람으로 지금도 글쓰기를 하고 있다.
독서모임에서는 주로 소설작품을 읽었다. 어쩌면 이런 선택은 내 의견이 많이 작용했는데, 그 당시 난 소설 읽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문학은 참담하지는 않지만, 무채색인 존재들이 버티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극적 공감이며 희망적 공감이었다. 무조건적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비루한 인생들이 살아내는 이야기를 원했었다. 겨울 낮의 짧은 햇빛이어도 그것으로 따뜻해질 수 있다는 생각. 활기차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인물이 나를 위로한다. 청청도야 소나무가 아니지만 선산을 지키는 굽은 소나무처럼 나에게 온다.
많은 사람이 다른 종류의 서적보다 문학서적을 가까이 하기 쉽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교양서적은 줄을 긋고 줄을 연결하면 피라미드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장편 리얼리즘 소설의 경우가 아니면 문학 작품은 읽고 정리할 내용이 분명히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감정에 치우치거나 상황 묘사가 중언부언이 강해 집중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거나, 서사의 전개가 분명하지 않을 때는 소설 읽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신형철 평론가가 전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떤 독자가 카르마조프카의 형제들, 시리즈 2권을 읽었다. 그런데 이 독자가 나중에 보니 중간에 다른 책이 있었다. 독자가 2편을 읽지 않아도 무리 없이 이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평론가의 추천(?)에 힘입어 나도 그렇게 읽었다. 1편은 갈등이 배경, 시작 그리고 3편은 갈등의 폭발이다. 정말 주제와 플롯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토리라인이 무리하게 길거나 복잡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고전이 그렇다. 그래서 독서모임은 주로 현대소설을 읽었다. 모두 소설의 인물에 자신을 넣어 또 다른 색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글쓰기와 독서모임은 매끄럽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흔들리며 나아갔다. 글쓰기 모임에서는 매주 글을 올리는 회원이 있는가하면, 글이 형편없다고 숨기는 회원도 있었다. 자신의 글에 대한 눈이 높아서 글을 공개하지 못하는 회원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글을 쓰는 압박이 정말 압박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독서모임에서는 책을 안 읽어보는 회원도 있었고, 귀동냥을 하는 사람과 책과 관계 없이 자기 이야기에 빠진 회원도 있었다. 그러다가 독서모임을 그만 두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매주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상식을 넘지 못했다. 어쩌면 2년 동안 유지되었던 것이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원 중 일부는 책보다 수다를 원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의 의미가 나만큼 절실하지 않은 회원들이 있었다. 독서모임의 해체는 어쩌면 나의 잘못이기도 하다. 회원들에게 독서모임의 의미, 기쁨을 잘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임의 회원들에게 난 백수 독서가의 한 명일 뿐이며, 종종 압박의 상징일 뿐이었다.
오늘도 내 곁에는 책이 있다. 그리고 글을 썼다. 나는 내가 대견하다. 글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어서? 직업적 글쓰기로서가 접근중이라? 아니다. 날 드러내는 데 조금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다. 날 흔들리게 하는 것은 책 속 인물이 가지는 논리성, 합리성이 아니라 섬광 같은 감정의 교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정연한 문장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솔직히 날 토로했는가이다. 작은 두 모임에서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회원은 정작 나임을 깨닫는다. 고맙습니다. 회원님들. -2021. 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