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플레이리스트가 있다고 한다. 글을 쓸 때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음악이 자신의 감정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음악이 외부로부터 오는 소음을 막아주는 백색소음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음악 장르에 관계없이 음악이 나의 집중력을 방해한다. 음이나 리듬에 대한 뛰어난 감각이 있어서 그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리에 예민할 뿐이다. 소리의 종류에 관계없이, 소리는 날 끌어당긴다. 날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트라우마적 기제 역할을 한다.
나에게 음악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서 음악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학교 음악시간에 악보를 보고 나는 기겁을 했다. 문맹과 같았다. 집에 가서 예습을 해올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집에서 그것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박자는 더욱 그랬다. 내게 학교 과목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체육과 음악이었다. 필기 시험은 그런대로 따라갈 수 있었으나 예체능은 그렇지 못했다. 대학 입시에서 그 과목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음악을 즐기는 아이들은 모두 잘사는 집 아이들이었다. 음악이야말로 사교육의 진가가 발휘되는 과목이었다. 타고난 재능이 없는 상태에서 가정의 경제적 수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학교의 음악 교육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별도의 사교육이란 지원은커녕 예술 과목에 신경을 써줄 집안 환경도 아니었다. 예술이라는 과목은 부모님의 머리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또한 학교 과목인 이상 학교에서 모두 익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60여명이 넘는 교실에서, 학교를 통하여 예술의 기초를 익히고 그에 대한 관심을 갖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에, 피아노 건반을 쳐다본 적도 없는 학생 그룹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아이에게 음악시간은 주눅이 드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내가 즐기는 음악이 대중가요 이상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대중가요도 그저 듣는 것이었고, 남이 없을 때 혼자 부르는 정도였다. 어른이 되어 기분으로 음악을 즐겼다. 음과 박자 감각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누구 앞에서 노래를 한 적이 없었다. 떼로 노래를 할 때 거기에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내 소리를 섞어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중년이 되어 우연히 참가하게 된 노래모임에서 지도하시던 음악선생님이 내 음색이 좋다고 칭찬하면서 노래를 계속 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모임에서 떼로 노래를 하는 것을 듣고 한 말이었다.
내 정서에 커다란 부분이 결여된 느낌이 있다. 어릴 적 내 결핍의 일정 부분은 음악과 관련된 곳에서 비롯된다. 지금이라도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볼까. 책 보듯이 음악을 즐기는 시간을 하루 얼마정도의 시간을 투자해볼까. 그러면 내 감정이 풍부해지지 않을까. 글쓰기 할 때 소음이던 음악도 언젠가는 백색소음으로 작용할까. 그러면서 내 글쓰기도 나아지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