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2편
미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상파 화가가 누구일까?
이견이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끌로드 모네의 인기는 상당히 높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의 아트숍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물건 중 하나가 모네의 그림이 프린트된 우산이다. 또한 1864년부터 약 5년간 무려 145점의 모네 작품이 미국에 팔렸고, 미국에서는 모네의 명성이 높아만 갔다. 아래의 사진은 지베르니(Giverny) 정원이 그려진 우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네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그림이 화려하고 색감이 아름다운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지난 2016년에 이어 2017년에도 한국에서 “모네, 빛을 그리다” 전시회를 하니 말이다. 전시회 말고도 한국조폐공사는 '디윰 아트메달' 시리즈의 두번째로 2017년 11월 모네의 그림과 금메달이나 은메달을 같이 배치한 제품을 출시하였고, 동아제약은 자신의 제품에 모네의 수련 그림을 포장지에 인쇄하여 판매하고 있다.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은 원래 제목으로 하면, <산책, 까미유 모네와 그녀의 아들 장>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상하다시피 모네의 부인과 아들이다. 또한 2014년 영화 <더 포저(The Forger)>에서 주인공인 존 트라볼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미술관에서 훔치는 그림으로 이 그림이 등장하기도 한다.
맨 앞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 중 하나인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유화 작품인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이다. 모네의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이 작품으로 인해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된다.
모네는 잘 알려졌다시피, 19~20세기 인상파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화가이다. 모네는 식료품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나, 15세 때 이미 풍자만화를 팔아서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다. 이 시기 모네는 자신의 스승이 되는 외젠 부댕(Eugene Boudin)과 만나게 되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자연광선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인상파는 외광파(外光派)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외부의 빛에 따라 달라지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직접 기록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화가들은 대부분 외부가 아닌 작업실 내부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눈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모네는 1859년경부터 후일 인상파 화가로 분류되는 우리가 익히 아는 유명화가들인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르 드가 등의 화가들과 교류하였고,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인상, 해돋이>를 출품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냥 <해돋이>라고 했다가 마지막에 '인상'이란 말을 추가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기존의 프랑스 미술아카데미가 지배하고 있던 회화기법인 '그랜드 매너(Grand Manner)'에 반발하며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게 된다. '그랜드 매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르네상스로부터 확립된 회화의 기법으로, 역사화를 고상하고 화려하게 표현하고, 보편성(일반성)을 추구하는 기법이었다. 즉, 회화의 주제를 가장 고상하고 진지하게 잡는 아카데믹한 이론으로 볼 수 있으며, 저속한 것이나 일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 전통적인 것이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전통과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전의 그림들은 작업실 실내에서 고상한 주제와 대상을 토널 배색(tonal color)을 이용하여 정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러하 토널 배색은 명도나 채도가 중간 정도로 물감을 혼합하여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주도록 하는 배색으로, 쉽게 얘기하면 가을이나 겨울의 옷 색깔이 주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면 아래 라파엘로 그림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을 보면 중심에 위치한 손가락을 위로 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플라톤(Plato)을 비롯하여 피타고라스, 에피쿠로스(Epicurus), 소크라테스(Socrates), 유클리드(Euclid) 등의 철학자, 수학자, 화가들을 배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톤은 안정적이며, 실제 있을 수 없는 이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여튼 인상파 화가들이 연 낙선전(살롱 데 르퓌제)은, 아카데미가 주도하는 살롱전(정식의 전시회라고 보면 됨)에 출품했으나 낙선하여 전시를 못 한 작품을 모아 개최한 전시회였다. 진보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인상파의 화가들과 기존의 보수적인 아카데미 간의 갈등은 이제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시기였다. 나폴레온 3세는 전제정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정책을 펴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로 아카데미의 살롱과 다른 낙선전을 개최하도록 한 것이다. 이 전시회에서 가장 비난을 많이 받은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였고,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 모두 그림이 완성이 안 되었다거나, 밑그림에 불과하다거나, 무엇을 그린지 모르겠다거나, 만들다 만 벽지가 더 낫겠다는 둥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비평가 루리 르루아(Louis Leroy)는 모네의 이 그림 제목에서 '인상파'라는 조소를 날렸고, 인상주의는 모네의 그림 제목인 <인상, 해돋이>에서 유래하게 된다. 조롱하는 말을 지어낸 르루아가 미술 역사를 바꾼 인상파의 이름을 지어 준 격이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기존의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기법과는 달리 사진을 찍듯 한 순간의 인상적인 풍경을 그린 것이며, 여기에는 역사적인 교훈도, 전통에 대한 경의도, 안정적인 토널 배색도, 정확한 윤곽도 없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림이었다. 지금이야 별 것 아니겠지만, 위의 라파엘로 그림 같은 것만 보아오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2014년 미국 텍사스 주립대 도날드 올슨 교수는 인터넷 과학뉴스 전문사이트인 스페이스닷컴에서 <인상, 해돋이>가 그려진 시간은 1872년 11월 13일 오전 7시 35분에 모네가 머무르던 라미라우테호텔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이 그림에 대한 관심은 과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네는 이후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인 지베르니(Giverny)에서 거주하면서 창작작업을 하게 된다. 모네는 1883년 작업을 위해 이곳을 찾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베르니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86세의 나이로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베르니에서 생활하였다. 게다가 1892년에는 집 옆의 작은 습지를 매입하여 일본식 수중정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모네의 유명한 연작인 <수련>이 탄생하게 된다. 무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련을 그려댔으니, 그 열정이 대단하다. 1909년 개인전에서도 수련을 그린 작품이 절반에 이르렀고, 1914년 대형 수련 그림을 여러 장 그려 그 중 8점을 선택하여 수련 연작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모네가 40여년 간 머물며 가꾼 지베르니는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모 화장품업체의 브랜드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럼 인상주의는 어떠한 배경으로 탄생했을까?
나폴레옹 3세의 전제정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는 등의 정치적인 변화는 기존의 전통과 보수적인 의식에 대한 반항이 싹트고 있었고, 이는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전통적인 아카데미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인상파에 영향을 준 사람들은 낭만주의자들과 사실주의자들이었다.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로 대표되는 낭만주의는 윤곽의 명확함을 배제하고, 빠르고 힘찬 붓질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한편, 토널 배색을 쓰지 않는 작품을 그려 나갔다. 들라크루아의 대표작으로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이 있다. 이 그림은 중앙의 여신이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를, 다른 한 손에는 대검이 꽂힌 총을 들고 있다. 배경이 되는 것은 1830년 프랑스의 브르봉 왕가를 무너뜨린 프랑스의 7월혁명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뉴욕에 가는 관광객들은 연간 4,7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뉴욕 하면 떠오르는 상징물은 타임스퀘어, 월스트리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브로드웨이, 옐로우 캡(노란 택시) 등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빼놓지 않는다. 이 자유의 여신상을 디자인할 때 모태가 된 것이 바로 위 그림의 자유의 여신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국민들의 모금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이때 자유의 여신상을 디자인 할 때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자유를 위한 혁명의 기운을 미국의 자유를 위한 독립과 연관시킨 것이 아닐까?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는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이다. 그는 주제에 있어 기존의 신화, 성화, 역사화 등의 전통을 깨고 천박하다고 취급받던 빈민층, 노동자, 서민 등의 일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쿠르베는 어느 성당에서 천사를 그려달라고 하니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려 주겠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을 만큼 있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그림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돌을 깨는 사람들(The Stone Breakers)>이 있다. 이 그림은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들어설 즈음인 1945년 2월, 독일의 드레스덴 근방에서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전소되었다. 전쟁의 비극은 사람들 뿐 아니라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품들에도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낭만주의 및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인상주의이다. 즉, 낭만주의의 기법을 계승하고, 사실주의의 주제의식을 계승하여 이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인상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과학적 발명은 무엇일까?
첫째로는 사진의 등장이다. 사진과 미술의 관계는 다음에 다른 주제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간단히 말하면 당시 사진이 등장하며 많은 화가들이 공을 들여 정교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봐야 사진을 능가할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많은 화가들이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밥벌이를 걱정하고, 전업을 하기도 하는 등 위기감이 팽배하게 된다. 반면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사진을 적극 활용하거나, 사진을 참조하여 자신의 그림들을 발전시켜 나간다. 같은 현상을 위기로 보는 사람들과 기회로 보는 사람들이 나뉘게 되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후자에 속하여 곧 미술계의 대세가 된다. 작금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이 튜브 물감의 발명이다. 이것이 우리가 더 이야기할 주제이다. 기차의 발명도 화가들이 자유롭고 쉽게 멀리 나갈 수 있게 되어 인상주의의 태동 및 발전에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모네는 기차를 주제로 한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아래의 그림은 <생 라자르역, 기차의 도착>이라는 작품이다), 인상주의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튜브물감의 발명이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인상주의 화가들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1841년 미국의 존 랜드(John Coffe Rand, 1801-1873)가 튜브물감을 발명함으로써 가능해 졌다. 튜브물감이 없던 시절에는 보통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하였고, 야외로 물감을 가지고 나가려면 돼지 방광에 유화물감을 넣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돼지방광에 넣은 물감은 휴대가 어렵고, 터지는 경우도 많아 불편했다. 르누아르는 “만일 튜브물감이 없었다면 모네도, 세잔도, 피사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존 랜드의 발명에 이어 1860년대에는 영국 런던의 윈저 앤 뉴턴(Winsor & Newon)사가 튜브물감을 대량생산하여 화가들에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튜브 물감 뿐 아니라 이동식 이젤, 접이식 팔레트 등도 이와 궤를 같이 하게 된다.
존 랜드의 튜브물감은 미국 특허 No.2252번으로 1841년 9월 11일 특허등록을 받았다. 존 랜드는 이 발명을 영국에서도 특허(No. 8863)를 받았다. 이 특허로 인해 물감이 야외로 자유롭게 나올 수 있었다. 이 특허는 영국의 Winsor & Newton사가 특허된지 1년여 만에 매입하게 된다(사실 매입한 것인지, 아니면 라이선스를 준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아래 사진의 세번째 물감튜브(Early makes of Metal Tubes)가 존 랜드의 튜브물감이다. 첫번째 것(Bladders in use)가 바로 튜브가 나오기 전에 사용된 돼지 방광에 채운 물감이다.
그러면 화가가 아닌 일반인인 우리가 더 많이 쓰고 있는 튜브형 치약은 어떨까?
앞선 존랜드의 특허의 도면을 보면, 우리가 쓰고 있는 치약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치약은 토머스 포스터(Thomas A. D. Foster)라는 치과의사가 1874년 6월 16일 미국에서 특허를 받았다. 발명의 명칭은 “치약의 개선(improvement in tooth-paste)”. 이는 미국 특허청에 1874년에 등록되었으므로, 존 랜드의 특허보다 무려 33년이 늦다. 이전의 치약은 튜브가 아닌 케이스에 넣었다고 한다. 튜브의 경우에는, 화가들이 필요한 물감용 튜브가 먼저 발명되고, 나중에 치약에 적용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분야에서 유용한 발명이 다른 분야에 적용되는 예는 수없이 많으며, 이것도 대표적인 예라도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존 랜드의 “물감을 보관하기 위한 용기 구조의 개선(Improvement in the construction of vessels or apparatus forpreserving paint)” 특허의 청구항을 보면, “물감이나 기타 유체가 밀폐된용기 내에 보관하기 위한 형태로, 일부의 유체를 때때로 배출하고, 배출에 따라 용기의 빈 부분이 약간의 압력에 의해 쭈그러 들어서 다시 채워지고, 유체가 매출되는 구멍은 때때로 닫히는 형태”라고 기재되어 있다. 특허를 보는데 있어서, 특허의 명세서(출원을 위해서 특허청에 제출하는 서류) 중에 특허청구범위(claim)에 기재된 내용이 해당 특허권의 권리범위가 된다. 나머지 기재된 부분과 도면은 특허청구범위에 기재된 발명을 설명하는 해설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허권을 침해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문제가 되는 '제품'과 해당 특허권의 '특허청구범위'를 비교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포스터의 치약 특허는 어떻게 기재되어 있을까? 이 특허를 보면, 청구항에 “실질적으로 분필, 오리스 뿌리, 느릎나무 껍질, 글리세린 및 물의 조합”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치약의 성분에 대한 것이고, 청구항 4항에는 “새로운 제조물품을 구성하는 위에서 기재된 것과 같은 반(半)유체 형태의 치약을 쭈그릴 수 있는 용기에 담은 패키지”로 구성된다. 결국 이 특허의 상세한 설명에 따라 치약을 보관하는 쭈그릴 수 있는 용기에 한정되는 청구범위가 된다.
그러면 포스터의 치약 발명 중 청구항 4항의 발명인 “새로운 제조물품을 구성하는 위에서 기재된 것과 같은 반(半)유체 형태의 치약을 쭈그릴 수 있는 용기에 담은 패키지”를 만들어 팔게 되면, 존 랜드는 포스터의 치약에 대해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하며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까?
물론 존 랜드의 특허는 포스터의 치약 특허가 출원했을 때 이미 보호기간이 만료되어 소멸되었다. 그러나 만일 존 랜드의 특허가 아직 보호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포스터가 특허를 출원하고 치약을 만들어 팔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존 랜드는 포스터의 치약을 만들어 파는 행위가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포스터의 입장에서는 자기 발명을 실시(제조 및 판매)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냐는 것인데, 이는 특허권의 성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특허권은 나만 내 발명을 실시할 수 있다는 독점권의 성격이 아니라, 내 발명을 남이 실시하지 못 하게 한다는 배타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내 발명이 내 것이고 이를 실시한다고 해도, 남의 특허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특허권을 획득하여 보유하는 것과 남의 특허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이 예를 들어 설명하면, 포스터가 치약을 금속튜브에 넣어 팔면, 포스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특허발명을 실시하는 것이지만, 존 랜드의 특허권에 기재된(정확하게는 특허청구범위에 기재된) 발명도 실시하게 된다. 존 랜드의 특허에서 권리범위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청구항의 기재에 따르면, 유체가 용기에 담기는데, 유체의 배출에 따라 비어진 부분이 쭈그러 들어 다시 빈 공간을 채울 수 있게 된다면 그 유체가 치약이라도(존 랜드가 치약까지 염두에 두었는지는 불명하나, 특허청구범위에 '유체(fluid)'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물감으로 한정하지 않으려는 의도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침해가 되는 것이다. 즉, 존 랜드는 청구범위를 기재할 때 유체(fluid)라고 했지 물감이라고 특정하여 좁게 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특허청에 제출하는 특허명세서를 법률적 요건에 맞춰 기재하여 출원을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특허청구범위라 할 수 있다. 명세서의 내용을 아무리 잘 써도 특허청구범위를 잘 잡지 않으면 그 특허는 등록을 받아도 별 쓸모가 없게 되기도 한다. 앞의 예에서 존 랜드가 특허청구항에 "유체"라고 하지 않고 "물감"이라고 했다면, 존 랜드의 특허는 치약을 담은 튜브에는 권리범위가 미치지 않아 특허권의 침해를 주장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존 랜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특허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할 때 자신이 발명을 실시하여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특허에 대해 실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실시료(로열티)를 받는 라이선스(license) 계약을 할 수도 있다. 이때 라이선스를 물감회사에만 줄 수 있는 것과 물감회사 뿐 아니라 치약회사나 화장품 회사와 같이 어떤 유체를 튜브에 담아 파는 회사들을 전부 라이선스를 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특허를 출원하는 자, 특허청구범위를 작성하는 경우 전문가를 통해 최대한 자신의 권리를 적절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작성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