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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병욱 Jan 19. 2018

마티스의 커피와 함께 있는 로레트와 커피전쟁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제15편

마티스 <커피와 함께 있는 로레트>

우리는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마티스는 야수파 또는 표현주의 작가로 배운 바 있다. 기억이 나시는지 모르겠지만. 위의 그림은 마티스의 <커피와 함께 있는 로레트(Lorette with Cup of Coffee)>라는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면, 한 여인의 머리맡에 커피잔에 따라진 커피와 스푼이 놓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침에 잠을 깨우는 모닝 커피를 만들어 여인의 머리맡에 놓은 것 같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20세기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마티스와 함께 비견되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당시 마티스와 깊은 교류를 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해 경쟁심과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마티스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등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고, 1904년 피카소,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야수파(포비즘, fauvism)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이러한 야수파는 이후 표현주의로 발전하게 되는데, 야수파는 화가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색과 모양을 배합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제한된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하는데, 이러한 면이 잘 드러난 그림이 아래의 <붉은 색의 조화(Harmony in Red)>이다. 그림에서 보면 탁자 위의 식탁보와 벽지는 하나의 평몈처럼 보이고, 빨간 색으로 뒤덮힌 전체 면이 강렬하다. 원색과 단순화된 표현을 통해 색채와 구성의 대담함이 새로운 미술의 지평을 열게 한 것이다. 이 그림은 최근 LG의 기업광고에도 등장한다. 여성의 뒤에 LG의 붉은 색 냉장고가 위치하여 있는 것으로 변형을 가한 것이다.  

마티스 <붉은 색의 조화>

마티스는 기존의 미술인 고전적인 회화와 입체파에 반발하여 탄생한 야수파가 일찌기 해체되고 나서 자신의 독자적인 길로 들어선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십이지장에 암이 생겨(제2차 세계대전과 어머니의 죽음이 암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수술을 받은 후에는 색종이를 오려 이를 캔버스에 붙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작품은 그가 말했듯이 붓 대신 가위로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마티스를 보고 피카소도 "그는 뱃속에 태양을 품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러한 색종이 그림은 종이에 구아슈(gouache)를 색칠한 후 가위로 이리저리 오려서 이를 캔버스에 붙이는 방식이다. 구아슈는 일종의 불투명 물감이며, 안료에 아라비아 고무를 섞어 만든 물감이고,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을 뿐 아니라, 현대 미술에서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재 화가로 불리는 이중섭도 구아슈를 이용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색종이를 오려 만든 작품을 커팅 아웃(cutting out)이라고도 부르는데, 지난 2014년 영국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과 미국의 현대미술관(MoMA)에서는 '앙리 마티스; 더 컷-아우츠(Henri Matisse: The Cut-Outs)' 전시회를 하기도 했다.

색종이 작업중인 마티스

다시 마티스의 처음 그림 <커피와 함께 있는 로레트>로 돌아가 보면, 로레트는 마티스가 즐겨 그린 그림의 모델 중 하나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델로, 마티스는 이 그림 외에도 그녀를 그린 많은 그림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로레트(Lorette)>를 비롯하여, <로레트의 머리(Head of Lorette)>, <검은 배경의 녹색 가운을 입은 로레트(Lorette in a Green Robe against a Black Background)>, <터번과 노란색 조끼를 입은 로레트(Lorette with Turban and Yellow Vest)> 등이 있다. <커피와 함께 있는 로레트>에서 주요 오브제(Object)는 로레트와 함께 커피잔과 커피이다. 커피에 대한 마티스의 그림은 이것 말고도 <커피(Coffee)>와 <아랍의 커피하우스(Arab Coffeehouse)>라는 작품이 있으며, 다른 그림들에도 종종 커피를 등장시킨다. 이는 마티스도 다른 예술가들과 같이 커피를 사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커피를 사랑한 대표적인 예술가 중에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울때는 '바하'라고 했으나(김광석의 노래 '먼지가 되어'도 '바하의 선율에 젖은 날에는'으로 시작한다), 이제는 '바흐'라고 하고, 최근에는 '세바스찬'도 아니고 '제바스티안'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한다. 원래의 발음에 가까워지는 추세에 맞는 것 같다. 마치 예전에는 '케빈 코스트너'라고 발음했지만 요즘에는 '케빈 코스너'라고 하듯이. 


바흐의 작품중에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가 있다. 칸타타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다'의 뜻을 가진 '칸타레(Cantare)'로부터 유래한 용어이다. 작은 오페라 같은 것인데, 소규모의 관현악에 얹은 성악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칸타타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칸타타와 세속적인 의미의 칸타타로 나뉠 수 있는데, <커피 칸타타>는 당연히 세속적인 칸타타에 속한다. 그 내용을 보면, 커피에 중독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커피를 끊지 않으면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이 딸은 "아~ 커피는 얼마나 맛이 기가 막힌지, 천번의 키스보다 더 사랑스럽고, 와인보다 더 달콤하다네. 내게 즐거움을 주려면 제발 커피 한 잔을 따라 주세요."라며 커피 사랑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바흐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짐머만이 운영하는 라이프치리의 커피하우스에서 연주를 하곤 했는데, 커피하우스의 홍보를 위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칸타타까지 만든 바흐도 역시 커피를 아주 좋아했음을 짐작케 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러면, 이제 커피 이야기를 해 보자.


커피는 전 세계인이 가장 즐겨 마시는 기호식품이다. 커피는 오늘날 세계 무역에서 원유 다음으로 물동량이 큰 제품이다. 연간 750만 톤에 이르며, 이를 커피 잔수로 환산하면 약 27억 잔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 통계청의 2017년 발표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이 428잔으로 세계적으로 소비량이 많은 국가 중 하나이다.


커피는 원래 아프리카가 원산지인데, 커피라는 명칭도 에티오피아의 카파(Kaffa)라는 지역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의 목동인 칼디가 어느날 염소들이 흥분하여 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염소들이 먹은 열매를 먹어 본 것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칼디는 이 빨간 열매를 먹고 피곤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고, 이를 수도승에게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후 수도승들이 이 열매를 먹고 기도를 하는데 도움이 되어 '신의 열매'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에티오피아 지역의 명칭인 카파에서 커피가 나왔다는 설 이외에도 아랍어로 '기운을 북돋우는 것'의 의미인 '카와(Quhwah)'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아랍어는 원래 와인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와인과 비슷한 각성효과가 있다는 것에서 커피에까지 명칭이 전이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 대신 '분나(Bunna)'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커피가 525년 에티오피나가 예멘 지방을 침략한 시기에 아라비아로 전해지게 되고, 예멘의 모카(Mocha) 지방이 커피의 재배지로 각광받아 우리가 아는 모카 커피가 만들어진다. 이 모카 지방은 항구도시였는데, 15세기에는 커피 거래를 주도하던 유대인 상인들이 유럽에 커피 공급을 독점하기 위한 유일한 커피의 수출항으로 정해지기도 한다. 이때 유럽에 커피를 대량으로 들여와 수익을 올린 회사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이기도 하다. 동인도 회사는 1616년 인도로부터 몰래 커피 묘목을 들여와 온실에서 재배하게 되고, 이 묘목을 다시 재배하기 위해 1696년 인도네시아 자바(Java)에 대규모 농장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자바가 커피의 대량생산기지가 된 것이다. 현재 주요 커피 생산국은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말고도, 브라질, 코스타리카 등의 남미 지역도 포함된다. 남미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재배한 나라는 가이아나이며, 역시 동인도 회사가 암스테르담에서 재배된 커피 묘목을 심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이 브라질, 콜롬비아 등으로 확산되어, 현재 브라질과 콜롬비아는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이 되었다.  


커피의 기록을 보면, 9세기 초 이슬람의 율법학자들이 음용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밤에 기도를 하는데 졸음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약으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해진 초기 사람들이 먹으면 밤도 안 오고, 정신을 맑게 해 주며, 힘이 나게 해 준다고 하여 일종의 보약처럼 생각한 것과 유사하다. 아랍인들은 커피를 귀한 약재로 생각하여 유럽으로 종자의 반출을 막고, 끓이거나 볶아서 가공한 상태로 유럽으로 수출을 하게 된다. 이후 유럽에 들어온 커피는 이슬람 지역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교도의 음료라 하여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예술가들이나 작가, 철학자들이 많이 먹고, 이것이 일반 대중에게 퍼지게 된다.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초기에는 가격도 비싸서 아무나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대단한 유행을 하여 구하기 어려운 음료이자 인기상품이 된다.


한편, 이러한 커피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고, 1650년대부터 커피하우스가 생기기 시작한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50년 영국에서 생겼다고도 하고,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생겼다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맞건 이후에는 전 유럽에 걸쳐 유행하게 된다. 1700년에는 영국 런던에만 2천 여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고 하니, 커피 열풍은 실로 대단했던 것 같다. 물론 커피하우스의 기원은 지금의 터키 지역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1475년 문을 연 '키바 한(Kiva Han)'이라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는 법으로 남편에게 커피를 끓여주지 않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까지 했으니, 커피를 마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초기의 커피하우스는 남성만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다양한 계층에게 문호는 개방되어 있었다. 남자들이 커피하우스에 죽치고앉아 그들만의 자유로운 만남과 토론, 때로는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자, 영국의 여성들이 이에 반대하여 '커피를 반대하는 탄원서(The Women's Petition againdt Coffee)'를 내기도 하였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후에는 여성들도 커피하우스의 출입이 허용된다.

커피를 반대하는 탄원서

이러한 커피하우스 중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e)가 운영하던 커피하우스는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런던 로이드사로 발전하고, 조나단 커피하우스(Jonathan Coffee House)는 현재 런던증권거래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커피하우스는 우체국의 역할도 하는데, 커피하우스에 걸린 자루에 편지를 넣어두면, 이를 배달하기도 한다. 이 뿐 아니라, 영국의 왕립학회도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아이작 뉴턴,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후크 등이 런던의 커피하우스에 모여 창립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고, 예술 분야에서도 현재 세계적인 경매회사인 크리스티(Christie's)나 소더비(Sotherby's)도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참고로 2015년 1월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에 의하면, 글로벌 예술품 경매시장의 활황으로 2015년 크리스티 인터내셔널이 약 8조 5천억원의 매출을, 소더비가 약 6조 4천억원의 매출을 올려, 전년대비 각각 17%와 18% 정도 늘어나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 부국의 부자들과 기존 부국의 신흥 부자들이 예술품에 투자를 많이 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고가의 예술품 경매에 중국인들이 없으면 경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중국이 예술계의 큰 손으로 등장하였다.

2012년 뭉크의 <절규>를 경매하는 소더비의 경매장 모습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럽의 커피하우스에서는 계층을 초월한 활발한 만남과 토론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분위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존중과 평등의식이 싹트게 되고, 새로운 사회의 주도계층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유럽의 커피하우스를 드나들었던 유명인들은 매우 많은데, 이러한 것이 역사가 오래된 많은 유럽의 카페에서 오늘날까지 홍보에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1710년대에 이르러 파리에만 300여 개의 커피하우스가 생겼는데, 자유로운 만남과 토론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1689년 문을 연 프랑스 파리의 '르 프로코프(Le Procope)'라는 카페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의 문인이나 사상가들이 자신의 글과 사상을 발전시키는 장소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파리의 카페 '드 포아(de Foy)'에서 시작되게 된다. 유럽의 근대사회는 커피하우스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1683년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점령을 위한 전쟁을 치룬 후 남겨 놓은 커피 자루를 프란츠 콜스키츠키(Franz Kolschitzky)가 받아 '블루보틀(Blue Bottle)'이라는 커피하우스를 열게 된다. 이후 커피를 대량으로 들여온 네덜란드에 이어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등의 나라들이 동참하게 되어 전 유럽에서 커피가 유행하게 된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1669년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로부터 커피 묘목을 선물받아 이를 심은 것으로 프랑스의 커피 역사는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때 커피가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는데,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년)으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 때로 추정된다. 고종은 당시 러시아 공사인 카를 베베르(Karl Weber)로부터 커피를 대접받았고, 커피에 푹 빠진 고종은 이후 덕수궁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정자를 지어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덕수궁의 서양식 정자 <정관헌>

또한 궁중다례에 기존의 차가 아닌 커피를 올리기도 하고, 외국의 손님이나 선교사 등에게 커피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양에서 온 것이라 '양탕국'이라고 불렸고, 이후 한자를 차용하여 '가배(咖琲)'라고 하였다. 고종에 의해 사랑받은 커피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인 손탁이라는 독일계 러시아 여성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정동의 한 건물을 호텔로 개장한 것에서 일반인들에게로 퍼지기 시작한다. 이 호텔이 1902년 만들어진 '손탁호텔'인데, 호텔의 1층에 '경성구락부'라는 카페를 연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라고 전해져 있었으나, 그 이전에 인천에 일본인이 만든 '대불호텔'이 먼저 있었고, 이 호텔이 항구를 통해 교역을 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당연히 카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최초의 카페가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유력하다. 최근 이미 사라진 '대불호텔'을 다시 복원하려고 인천시 중구에서 추진을 한 바 있는데, 남아있는 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고증이 어려워 이를 복원하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복원의 의미도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기도 하였다.

인천의 대불호텔

이후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 의한 카페가 여러 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한국인들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최초로 연 카페는 '카카듀'라는 곳이었는데, 당시 영화감독이자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거치고, 외국의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이 들어오며 역사가 오래된 많은 다방이 사라지고 말았다. 일제시대의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한 다방 중에는 요절한 천재시인으로 불리는 이상의 '제비다방'도 있었다. 지난 2016년 잡지 <미술세계> 11월호에서 문화평론가 박광민씨가 '제비다방'의 위치를 찾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다방은 1956년 엤 서울대 문리대 건너편에 문을 연 '학림다방'으로, 아직도 대학로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학림다방은 우리나라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민주화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인데, 마치 프랑스의 커피하우스들이 프랑스 혁명의 근거지가 된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이청준, 김지하, 김승옥, 천상병, 김민기, 전혜린 등이 글을 쓰거나 예술과 문학을 논하는 자리였고, 1981년 군사독재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소위 학림사건은 이 다방의 이름 때문에 당시 치안본부에서 지은 이름이다.

1983년 7월 28일 경향신문에 실린 학림다방의 모습

현재는 급격한 국제화와 산업화로 인해 수 많은 다방들이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 자리를 스타벅스, 커피빈, 파스쿠치, 엔제리너스, 카페베네 등의 다국적 기업 또는 국내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카페가 대신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거대한 커피 전문점은 누가 뭐래도스타벅스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스타벅스는 전 세계 64개국에 총 23,187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1,000여 개의 매장이 있다니, 1999년 서울의 이화여대 정문 앞에 처음으로 생긴 이후 5년만에 100호점을, 다시 10여 년 만에 1,000개에 이르는 매장을 냈으니, 그 성장 속도는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스타벅스는 1971년 미국 시애틀에서 처음으로 매장을 열었다.

현재 스타벅스 1호점의 내부 모습(출처: pixabay)

처음에는 교사 2명과 작가 1명이 공동으로 창업을 했고, 1984년 커피 원두를 공급하던 피츠사를 인수하게 된다. 한편 하워드 슐츠는 1985년 '일 조르날레(Il Giornale)'라는 커피솝 체인을 차려 사업을 하다가, 1987년 스타벅스를 인수하게 된다. 그는 이전의 매장을 모두 스타벅스 매장으로 바꾸고, 시애틀 이외에 밴쿠버에 매장을 내는 것을 시작으로, 글로벌한 커피 프랜차이즈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 스타벅스는 1995년 뉴욕 맨하탄 타임스퀘어의 코카콜라 간판을 디자인 한 라이트 매세이(Wright Massey)를 고용하여  스타벅스 매장을 새롭게 재디자인하게 되고, 1996년 일본 도쿄, 1998년에는 영국 런던에 매장을 내는 한편, 기존의 프랜차이즈인 시애틀 베스트 커피(Seattle's Best Coffee)와 토레파지오네 이탈리아(Torrefazione Italia)를 2003년 인수하는 등 광폭의 행보를 보인다.

스타벅스 로고

스타벅스의 급격한 성장에 따라 수 많은 법적 소송에 휘발리게 되는데, 주로 상표권과 저작권 또는 불공정 거래 등에 관한 소송이었다. 이러한 소송 중에 커피 원두와 관련하여 커피의 주산지인 에티오피아 정부와의 소송은 커피전쟁(coffee war)라고도 불리던 분쟁이었다. 우리가 커피를 마실때 원하는 원두를 이용하여 추출한 커피를 마시게 되는데, 이때 적절하게 여러가지 원두를 섞어 갈아 만든 커피는 블렌드(blend) 커피하고, 한 가지 종류의 커피 원두를 사용하여 추출한 커피를 흔히 '싱글 오리진(single origin)'이라고 한다. 만일 '나 오늘은 하와이안 코나 먹고 싶네'라고 하면, 하와이(Hawaii)에 있는 빅 아일랜드(Big Island)의 코나(Kona) 지역에서 재배된 커피를 먹고 싶다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와이안 코나는 자마이카 블루마운틴, 예만 모카 마타리와 함께 세계 3대 커피라고 불리는 참고로 하와이는 미국의 유일한 커피 생산지이며, '허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이나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 of Tom Sawyer)'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다른 어떤 커피보다 풍요로운 향기가 있는 코나 커피는 최고의 커피가 재배되어야 할 바로 그 곳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언제나 당신의 가깝고도 다정한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예찬한 바 있다.  

마크 트웨인(출처: pixabay)

이렇게 커피는 그 원산지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고, 사람들도 그 원산지의 명칭에 따라 원두를 선택하게 된다. 유명한 커피의 산지로는, 자마이카의 블루산맥에서 재배되는 블루마운틴(Blue Mountain), 코스타리카의 따라주(Tarrazu), 과테말라의 안티구아(Antigua), 에티오피아의 하라르(Harrar), 이카체프(Yigacheff), 시다모(Sidamo), 예멘의 모카(Mocha),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Kilimanjaro), 인도네시아의 자바(Java)와 만델링(Mandheling)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들은 모두 대규모의 커피 농장을 갖고 있고, 커피는 주로 서방세계에서 많이 소비되는데 이러한 스페셜티 커피들의 가격은 다른 커피에 비해서 비싸게 팔린다. 그러나 현지의 농민들은 그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 하고,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예를 들어 전체 수출액 중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60%에 달하는 에티오피아의 경우 커피 생두의 가격은 현지에서 킬로그램당 가격이 1달러가 채 안 되는 반면, 이것이 미국에서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가격은 20 내지 28 달러에 이른다. 그러면 이러한 불균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여러가지로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지만,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를 지식재산권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티오피아의 주요 커피 산지인 하라르(Harrar), 이카체프(Yigacheff), 시다모(Sidamo)의 명칭을 상표권으로 등록받아 이를 행사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 세계 40여 개국에 상표출원을 진행하고, 2005년 유럽과 일본에서 이를 등록받고, 미국에서도 '이가체프'를 등록받는다.

에티오피아 커피 로고

에티오피아 정부는 해당 상표권에 대해 전 세계의 커피 전문점과 유통업자 등을 상대로 무상의 라이선스(royalty-free license)를 주기로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의 핵심은 정당한 보상을 받는 거래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상표에 대한 로열티는 무상으로 하되, 그들이 구매하는 원두의 가격을 현실화하여 자국 농민들의 수입을 증대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많은 회사들이 에티오피아 정부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다.


당연히 에티오피아 정부로서는 가장 큰 잠재적인 라이선시(licensee)인 스타벅스에도 라이선스 제안을 한다. 하지만 스타벅스는 에티오피아 정부의 상표권을 인정할 수 없으며, 상품의 산지를 표시하는 것에 불과한 '시다모'나 '하라르'에 대해서는 상표로서 등록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라이선스를 거부한다. 스타벅스도 역시 에티오피아의 '이가체프', '하라르', '시다모'의 명칭을 사용하여 커피를 팔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주요 커피 산지

의 주장은 이러한 산지나 품질을 표시하는 것에 불과한 표장은 증명표장(certification trademark), 또는 지리적 표시(Geographic Indications)로 등록을 받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타벅스의 주장과 상표 등록을 저지하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 정부는 해당 상표권의 등록에 성공한다. 이에 지난 2006년 에티오피아 정부와 스타벅스는 라이선스 계약에 합의한다.


계약에 따라 스타벅스는 에티오피아 정부에게 로열티 없는 라이선스를 체결하고, 원두의 구매가격을 올려 준다. 이로서 에티오피아산 원두의 가격은 파운드당 1.4 달러에서 2 달러 선까지 상승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에티오피아 정부의 지식재산을 수익화하는 전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로는 에티오피아 정부는 자국 농민의 수입을 늘이고, 국가적인 부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식재산권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외교적인 통로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압박을 통해 스타벅스의 항복을 이끌어 낸 것이 아니고, 국제적으로 상표권을 통해 스타벅스와의 라이선스가 가능해졌고, 또한 자국의 이익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처럼 지식재산은 그 자체로 수익을 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이익의 배분이나 다른 비즈니스에서의 수익을 위한 지렛대의 역할도 할 수 있다. 크로스 라이선스를 통해 새로운 시장에 진입할 수도 있고, 하나의 라이선스를 통해 다른 분야의 비즈니스에 대한 자유도를 확보할 수도 있다.


두번째로는, 에티오피아 정부가 어쩐 종류의 지식재산을 취득할 것인지에 대해 초기부터 장래의 분쟁이나 라이선스 전략에 맞춰 전략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가체프', '시다모', '하라르' 같은 명칭을 지리적 표시나 증명표장으로 등록을 했다면, 유리한 라이선스를 체결하지 못 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표시는 해당 지역에서 생산 등을 한 경우에만 보호대상이 된다. 만일 '시다모'를 에티오피아의 시다모 지역이 아닌 비슷한 기후나 풍토의 다른 지방에서 생산하게 되면 보호되기 어렵다. 또한 증명표장의 경우에도 그 보호 범위가 좁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를 상표권으로 등록하는 전략을 정확하게 구사한 것이다.


세번째로는, 에티오피아 정부가 전문가들을 잘 활용하고, 국제적인 여론을 잘 조성한 것이다. 에티오피아 정부의 승리 이면에는 정부를 자문하고 지원한 미국의 '라이트 이어즈 아이피(Light Years IP)'라는 비정부 단체(NGO)가 있었다. 이 단체는 아프리카 지역의 빈곤과 불평등,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 서 온 단체이며, 전문가들이 포진된 전문성이 있는 단체이다. 이러한 단체의 지원은 에티오피아 정부의 전략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단체는 에티오피아 정부 이외에도 초콜렛의 원료인 카카오를 생산하는 가나에 대해서도 지원을 한 바 있다. 이에 더하여 옥스팜(OxFarm) 같은 국제적인 인도단체와 적극적인 협력을 꾀한 것도 스타벅스에게는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라이트 이어즈 아이피의 보고서 중 커피, 카카오에 대한 성과 설명 부분 

위에서 에티오피아 정부의 지식재산을 이용한 전략을 살펴 보았지만, 이 사례는 정부 뿐 아니라 일반 기업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와 방법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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