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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병욱 Mar 16. 2018

에드워드 호퍼와 수입금지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제19편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 호크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 컴퓨터와 인터넷은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과 소통의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바퀴는 이동수단의 획기적인 혁신을 이루었고, 문자와 종이는 인류의 지식과 역사를 기록하여 전달함으로써 인류 전체의 진보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달력과 시계는 사람들이 공동체적 생활에 필수적인 조건을 만들었다. 게다가 나침판과 지도는 신대륙 발견 및 항해와 여행을 가능하게 한 소중한 발명품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위대한 발명품으로 인정되는 것이 전구이다. 이전에 인류는 자연에 순응하여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단순한 삶을 살던 사람들은 전기와 전구로 인하여 밤에도 낮처럼 활동을 확대하게 된다. 물론 이전에도 등잔, 가스등, 양초 등의 불을 이용하긴 했지만, 최초의 전구로 인하여 이전과는 비할 바 없는 밝은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백열전구는 탄소로 만들어진 막대를 이용한 아크(arc)등이었다. 이러한 아크등은 1808년 영국의 험프리 데비(Humphry Davy)가 처음으로 발명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전기를 이용한 조명이었고, 배터리에 탄소 조각을 연결하여 제작되었다. 하지만 빛이 너무 맑았고, 수명이 짧아 실제 상업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것을 개량하여 전구 내에 필라멘트를 이용한 백열전구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에 의해 1879년 발명되었다.

토마스 에디슨

에디슨은 1879년의 마지막 날, 미국 뉴저지의 언덕길에 290개의 전구를 이용한 가로등을 선보인다. 이것이 필라멘트를 이용한 최초의 백열전구가 세상에 공개한 날이었다. 이를 보고 독일의 역사학자인 에밀 루트비히는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후 인류는 두번째 불을 발견한 것이며, 인류는 이제 밤의 저주에서 벗어났다"고 평하기도 한다. 에디슨의 조명회사인 에디슨 전기조명회사(Edison Electric Light Company)는 전구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이라는 거대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된다. 에디슨은 발명왕으로 불리며 1,000개가 넘는 특허를 등록받은 바 있다. 에디슨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리지만 어째든 수 많은 발명을 통해 창업하고, 이를 글로벌 기업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원래 필라멘트를 이용한 전구는 에디슨보다 1년 빠른 1878년 영국의 조셉 윌슨 스원(Joseph Wilson Swan)이라는 물리학자가 먼저 선을 보였다. 그는 진공으로 된 유리구 안에 탄화된 종이 필라멘트를 넣은 전구를 발명했지만, 역시 진공상태가 양호하지 않고 전기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수명이 짧은 단점으로 인하여 사용되기 어려웠다. 다음으로 캐나다의 의료전기기사인 헨리 우드워드(Hanry Woodward)가 자신의 동료와 함께 진공이 아닌 질소를 채워 전구를 만들었고, 이를 특허로 등록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전구를 사업화하지 못 하고, 1879년(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해)에 에디슨에게 자신의 특허를 매각하게 된다. 에디슨은 필라멘트를 탄화 대나무로 만들어 수명을 연장했고, 이 전구와 함께 이를 위한 발전기 등의 전구 사용을 위한 기구들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전구를 개발했기 때문에 최초의 백열전구 발명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위의 스원 말고도 에디슨 이전에 백열전구의 발명자는 20명 이상 있었다고 하니, 엄밀하게는 필라멘트를 이용한 전구의 최초 발명자는 에디슨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백열전구는 증기선인 컬럼비아호에 최초로 상업적인 적용이 되고, 이후 뉴욕시를 중심으로 공장이나 거리에 설치되기 시작한다. 탄소 필라멘트를 이용한 전구에 이러 성능 및 수명을 개선하기 위해 필라멘트의 재질은 미국의 윌리엄 데이비드 쿨리지(William David Coolidge)에 의해 텅스텐으로 바뀌게 되고, 모양도 용수철같은 것으로 개선되어 더 밝고 수명이 긴 전구가 개발된다. 

에디슨의 최초 전구

우리나라에는 고종 때인 1887년 최초로 경복궁의 건청궁에 설치된다. 최초로 에디슨이 뉴저지에서 전구를 밝힌 때로부터 불과 8년만이니 이 시대로서는 아주 빨리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에디슨 전기조명회사가 이를 설치하였고, 동양에서는 최초의 설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자주 꺼지고 비용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건달불'이라고도 불렸고, 도깨비불이나 마귀불이라고도 불리었다 한다. 건청궁에 전기를 이용한 전구가 설치되고, 이를 위한 발전소를 만들게 된 것은,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에 의해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여 미국의 주요 기관 및 산업시설을 시찰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이 전기와 전등을 보게 되고, 에디슨 전기조명회사와 전기와 전구의 도입을 상담하게 되고, 에디슨 전기조명회사는 조선에 홍보를 위해 먼저 경복궁의 건청궁에 가설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맨 앞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이다. "나이트호크"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 또는 밤에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나이트 호크들이 밤에 돌아다니든, 식당이나 술집에서 밤을 새우든 전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그림의 식당에 설치된 전구는 에디슨의 회사에서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겠다.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1882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뉴욕의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취직을 한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재능과 욕구로 유럽의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를 다녀 온 후 미국에서 잡지와 소설의 삽화를 그리게 된다. 화가로서의 삶은 여기에서 시작되고, 이후 광고 일러스트나 영화의 포스터를 그리기도 하며, 전시회를 열기도 하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 한다. 결혼 후에 아내의 추천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이전의 그림들과 달리 큰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 준다. 그는 미국의 도시와 농촌의 풍경을 주된 주제로 삼은 사실주의 화가로 성장하고, 이러한 일상적인 풍경과 인물들의 그림은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 준다. 이 시기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등의 추상표현주의(Abstrct Expressionism)가 떠오르며 호퍼의 사실적인 그림이 낡은 작품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재평가되면서 가장 미국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이후의 앤디 워홀(Andy Warhole) 등으로 대표되는 팝 아트(Pop Art)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추상표현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이브 클랭(Ive Klein)이나 아르망(Fernandez Arman) 등으로 대표되는 신사실주의(Neorealism)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그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도시의 식당에 몇 명의 손님들이 한밤중에 앉아 있다. 이들은 평범한 손님이겠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대해지고 욕망으로 채워진 대도시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을 건조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호퍼는 이 그림을 자신이 살고 있던 뉴욕 맨하탄 근처 그리니치 빌리지의 어느 식당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식당의 간판에 "PHILLIES"라고 씌여 있는 것을 보면 필라델피아가 아닌가도 생각이 든다. 여튼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밤에 쓸쓸히 등을 보이며 앉아 있는 젊은 신사 한명과 정면으로 보이는 한쌍의 연인이다. 이들을 비추는 빛은 식당의 내부 뿐 아니라 식당 밖의 거리까지 비추고 있다. 빛과 어두움의 대비로 우울함과 쓸쓸함이 배가되는 효과가 있다. 호퍼의 그림들은 이와 같이 도시의 빛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적극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1942년 작품이므로, 이미 에디슨의 조명회사에 의해 미국 주요 도시에 필라멘트형 전구가 보급되어 설치가 된 상태였다. 기술의 발전이 미술사조의 변화와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간 결을 바꾸어 이야기해 보자.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는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도날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대선때부터 줄곧 외쳐온 구호이다. 전체적으로는 미국 우선주의라고 번역하고, 사회적으로는 백인우월주의로 읽히기도 하고, 대외적으로는 보호무역주의로 읽히기도 한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는 지난 2003년 유럽경제학회에서 대안 경제학의 방향을 제시한 학자에게 수여하는 군나르 뮈르달상을 수상한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군나르 뮈르달상은 1974년 영국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eidrich Hayek)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경제학자인 카를 군나르 뮈르달(Karl Gunnar Myrdal)을 기리기 위한 상이다. 군나르 뮈르달과 하이에크는 서로 반대의 주장을 많이 하여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화폐적 경기론 등으로 자유주의 입장에서 계획경제에 반대하고, 케인스의 이론을 반대하여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옹호한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아버지로 불리는 경제학자였다. 반면, 뮈르달은 통화 불균형 이론이나 누적적 인과관계 등을 통해 세계 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미국의 흑인 문제를 분석한 저서인 <미국의 딜레마: 흑인 문제와 현대 민주주의>를 쓰는 등 신자유주의 경제를 비판하고 국가에 의한 계획경제의 필요성을 상조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가진 두 명의 경제학자가 동시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뮈르달의 누적적 인과관계라는 것은, 예를 들어 미국의 흑인 문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흑인의 소득을 감소시키고, 이에 따라 흑인들의 경제, 지식, 교육, 생활, 건강 등의 수준이 악화되고, 다시 이는 흑인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장하준 교수의 저서인 <사다리 걷어차기>로 돌아와 보면, 장교수는 미국을 비롯한 지금의 선진국들이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산업에 대한 보호정책을 통해 성장해 왔음을 주장한 바 있다. 자본주의의 선진국들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면서 외국의 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에게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국제기구를 장악하고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즉 자신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남들이 뒤따라 올라가려고 하니 사다리를 걷어 차 올라오지 못 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다리 걷어차기는 장하준 교수가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 이미 150여년 전 독일의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Georg Friedrich List)가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다른 이들이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로, 매우 교활한 방법이다"라고 한 바 있다. 소위 주류 경제학으로 불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냉철한 역사적이며 경제학적인 분석이라고 생각된다. 장하준 교수는 "선진국은 지금 그들이 개발도상국에 하지 말라고 권하는 정책과 제도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하기도 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3월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 등에 재해 관세를 대폭 올리겠다고 하는 한편, 우리 나라의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 가드(safeguard) 조치를 발동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시장에서 팔리는 한국의 세탁기는 가격이 오르게 되어 경쟁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보호무역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부족하고, 이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에 따라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2018년 3월 8일자로 미국을 비롯한 보호무역의의 확산, 내부적 결함, 중국의 국가주도 자본주의 등의 문제로 세계무역기구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은 이전과 달리 세계화와 개방을 개발도상국에게 요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산업과 경제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노골적인 정책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역 및 통상정책에서 수입을 금지하거나 제한을 두거나 관세를 대폭 올리는 등의 문제에서 관여하는 기관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무역위원회(KTC; Korea Trade Commission)가 있어서 불공정무역행위나 덤핑 등을 규제하고 있다. 이러한 기관은 당연히 미국에도 있는데, 이것이 미국국제무역위원회(USITC; United States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이다. 원래 보호무역주의로 성장한 미국은 미국국제무역위원회를 통해 여러가지 규제를 취하는데, 주된 활동으로 불공정 수입행위에 대한 조사로 흔히 섹션(Section) 337 조사로 불리며, 법률적 근거는 미국 관세법 19 U.S.C. 1337조에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지식재산권의 침해에 해당하는 경우나 불공정 무역행위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미국국제무역위원회에 소송을 제기하여 수입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다. 

워싱턴 D.C에 소재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

이러한 무역위원회의 소송은 흔히 ITC 소송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비해 21세기에 들어서는 많은 지식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 이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침해소송은 일반 민사법원에서 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가 있는 반면, ITC 소송은 보통 18개월 내에 결정이 나고 수입을 금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많은 ITC 소송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제기하기도 한다. ITC 소송은 ITC 내의 행정판사(Administrative Law Judge, ALJ)가 판단하게 되고, 절차는 일반적인 침해소송과 유사하다. 행정판사가 결정을 하게 되면 이를 최초 결정(initial determination)이라 하고, 이 결정을 다시 리뷰하여 최종 결정(final determination)을 위원회(Commission)에서 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되고, 위원회의 최종 결정이 특허 등의 침해로 결론나면 수입금지 조치를 위하게 되는데, 이는 대통령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대통령이 ITC의 최종 결정을 승인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는데, 2013년 삼성이 애플을 상대로 한 CDMA 관련 표준특허 침해를 이유로 ITC에서 최종 승소하여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대해 수입금지 결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승인을 거부한 바 있다.

삼성이 애플을 상대로 제기한 ITC 소송의 결정문 첫 페이지

ITC의 최종 결정은 수입배제명령(exclusion order), 중지 명령(cease-and-desist order) 등이 있다. 여기에서 수입배제명령은 미국으로 수입을 금지하는 명령으로, 그 적용범위가 피소자의 물품으로 한정하는 제한적 수입배제명령(Limited Exclusion Order, LEO)와 피제소자 뿐 아니라 제3자의 모든 관련 침해물품에 대해 수입을 금지하는 일반적 수입배제명령(General Exclusion Order, GEO)가 있다. 중지 명령은 위반한 모든 행위자들을 상대로 수입배제명령과 담보공탁을 명령하는 대신 하거나, 이러한 명령과 함께 해당 행위를 중지하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이러한 ITC 소송은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한 제도이므로, 수입을 금지시키는 것에 그치고 일반 민사법원의 침해소송에서처럼 침해금지나 금전적 손해배상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수입금지 명령을 받게 되면 외국의 사업자의 경우에는 미국 시장에 제품을 판매할 수 없게 되고, 미국 기업의 경우에도 생산 설비나 공장이 중국 등의 외국에 있는 경우에는 이를 미국으로 수입할 수 없기 때문에 막대한 비지니스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강력한 조치 때문에 우리 기업들도 미국을 상대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거나, 사업을 진행하고자 한다면 민사소송으로서의 특허침해소송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ITC 소송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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