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제20편
역사상 자신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가는 여러 명 있는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도 자화상을 많이 그렸고, 프리다 칼로(Frida Kalo)나 구스타브 쿠르베(Gustav Courbet) 또 다른 화가로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Dutch Golden Age)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가 있다.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는 17세기 네덜란드가 교역과 과학 및 예술에 있어서 전 세계의 중심이 된 시기를 말하며, 1588년 네덜란드의 연방공화국이 성립되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음과 동시에 해외진출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미와 일본, 호주 등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 시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네덜란드는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 활동한 사람들로는 렘브란트 외에도 우리가 북유럽의 모나라지라고도 하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ing)>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같은 화가와, <우신예찬>을 지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나 '내일 지구가 멸먕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명확한 근거가 없어 진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스피노자(Baruch Spinoza) 같은 철학자 등이 있었다. 페르메이르(예전에는 '베르메르'라고 불리기도 한)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1999년 미국의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Tracy Chevalier)에 의해 소설화된다. 이것이 다시 영국의 영화감독인 피터 웨버(Peter Webber)가 2003년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과 콜린 퍼스(Colin Firth)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재탄생하게 된다. 여기에 나온 콜린 퍼스는 바로 <킹스 스피치(King's Speech)>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하고, 영화 <킹스맨(Kingsman)> 시리즈의 그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이 그림의 소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Mona Lisa)>와 이탈리아의 여성 화가인 엘리자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의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와 함께 3대 미녀 그림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참고로, 베아트리체 첸치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실존 인물로,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당시 16세의 소녀이다. 시라니의 스승인 귀도 레니(Guido Reni)는 단두대로 오르기 직전의 베아트리체 첸치를 그렸고, 이를 다시 시라니가 그렸는데 시라니가 더 아름답게 그린 것으로 평가된다. 바이런, 키이츠와 함께 영국의 3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불리는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는 이 그림을 보고 1819년 그녀의 비극을 주제로 한 시극 <첸치 일가(The Cenci)>을 썼으며, 프랑스의 대문호 스탕달(Stendhal)은 1839년 베아트리체 첸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첸치 일가>를 쓰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는데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약 100점의 자화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22세에 그린 자화상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에게도 영감을 주어 괴테에게 큰 명성과 인기를 가져다 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이 탄생하게 되기도 하였는데, 이 소설의 유행으로 당시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소설 속 주인공인 베르테르를 따라서 하는 옷차림인 푸른색 연미복에 노란색 조끼가 유행할 정도였다. 급기야는 소설 속에서 결국 자살한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회적으로 영향이 높은 우명인의 죽음 이후 이를 따라 자살을 시도하는 사회적 심리현상을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2003년 홍콩의 유명 배우였던 장국영의 자살 이후 9시간 만에 6명의 팬들이 자살한 것이나, 1998년 일본의 락밴드 엑스 재팬(X Japan)의 기타리스트였던 히데(Hide)의 자살 이후 청소년들의 자살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중세의 유럽회화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종교화가 주류였으며, 르네상스에 이르러 종교와 신화의 주제와 함께 인물이나 풍경에 대한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던 중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신이나 귀족이 아닌 평범한 인물들이 그림에 등장하고, 본격적으로 자연을 그리는 풍경화와 정물화(still life)들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물화는 먹다 남음 빵이나, 썩어가는 과일, 치즈나 모래시계, 촛불 등이 많이 등장하고, 이어 해골이나 시계, 비누거품이나 꽃 같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그려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려는 그림들이 유행하게 된다. 이러한 정물화를 바니타스(Vanitas)라고 한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공허'의 의미이며, 성경의 전도서 1장 2절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에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세 말 흑사병이나 종교전쟁 등으로 삶의 비극성이 극도에 달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그림들을 보면, 해골이나 모래시계, 촛불이나 꽃 등으로 삶의 허무함을 나타낸 정물화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16세기 독일의 화가인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Tounger)의 <대사들(The Ambassadors)>인데, 그림의 아래 부분에 변형됨 모양의 해골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과 사물의 의미는 현대까지도 영향이 있어, 팝 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Andy Warhol)도 <해골(Skull)> 시리즈로 죽음의 의미를 시각화하고 있으며, 영국 현대미술의 스타인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도 지난 2007년 8,601개의 다이아몬드와 2,156g의 백금으로 만든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을 만든바 있다.
다시 처음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램브란트가 그린 수 많은 자화상 중 하나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여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많은 자화상을 그린다. 말년의 늙은 모습을 남기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이 당시 자화상을 그리던 화가들은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보고 그렸을까?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으므로,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면서 자화상을 그렸다. 사진의 역사는 19세기 프랑스의 발명가인 조셉 니세르포 니엡스(Joseph Nicerphore Niepce)라라는 사람이 감광물질을 금속판에 발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pscular)를 이용하여 빛에 노출시킴으로써 복제가 가능한 화상을 얻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암상자에 구멍을 뚫어 이를 반대면에 바깥의 상을 맺히게 하는 방법이며, 이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사진처럼 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니엡스는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이 발전하여 영국의 헨리 폭스 톨버트(Henry Fox Talbot)은 빛에 반응하는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사진을 만드는 칼로타입(Calotype)의 사진을 개발하고, 이는 네거티브 원판만 있으면 대량으로 사진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 우리도 잘 아는 '코닥(Kodak)'의 설립자인 조지 이스트먼 코닥(George Eastman Kodak)에 의해 현대의 네거티브 필름이 만들어지게 된다. 물론 현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필름 카메라는 널리 이용되고 있지는 않다. 이미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로 자리잡고 있으며, 심지어 영화나 TV도 디지털로 많이 제작되고 있다.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는 1975년 코닥의 엔지니어였던 스티브 세손(Steve Sesson)에 의해 개발된다. 1981년에는 일본의 소니(Sony)가 최초로 휴대용 저장장치에 사진을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를 출시하고, 1990년에는 내장된 메모리에 사진을 저장하는 카메라가 미국에서 출시된다. 이후 디지털 카메라는 스마트폰에도 장착이 되고, 동영상 촬영도 가능할 뿐 아니라, 그 사이즈나 성능에 있어서도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사진이나 카메라의 등장 및 발전으로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매우 편리해졌다. 이제는 사진을 찍어 이를 보고 그림을 그리면 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초상화를 마루의 벽에 걸어 놓는(물론 귀족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그랬겠지만) 집이 많았다. 하지만 사진의 등장으로 초상화가 아닌 사진을 걸어 놓는 것으로 집안의 풍경이 바뀐다. 자신의 모습을 남겨 놓기 위해서 사진관에 가서 자신이나 가족의 사진을 찍어 집에 걸어 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요즘은 없고, 디지털 카메라의 발전과 대중화로 어디를 가든 스스로 사진을 찍어 보관하거나 복제하거나 전송할 수도 있게 되었다.
자신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남이 찍어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찍을 수 밖에 없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해결한 것이 소위 '셀카봉'이다. 요즘에는 카메라를 셀카봉에 설치하여 들고다니면서 TV 프로그램을 촬영하기도 하고, 일반인들도 여행을 갈 때 셀카봉을 들고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면 셀카봉은 누가 처음 발명한 것일까?
셀카봉(Selfie stick)은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일본의 카메라 제조회사인 미놀타(Minolta)의 우에다 히로시(Ueda Hiroshi)라는 개발자였다. 그는 동료 개발자인 미마 유지로(Mima Yujiro)와 함께 개발한 셀카봉을 일본에 1983년 특허출원하여 1984년 등록을 받는다. 그는 미국에서도 1984년 1월 출원하여 1985년 7월 등록을 받았는데, 아래의 그림이 미국 등록 특허의 도면이다. 당시에는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이나 스마트폰도 없었고, '셀카'라는 말도 없었던 시기였다. 한 마디로 특허는 있었으되 상용화는 커녕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특허였던 것이다. 이 특허는 일본에서는 2003년, 미국에서는 2004년 존속기간이 만료되어 소멸된다. 히로시는 "내 아이디어는 너우 빨랐랐어요. 나는 300여개나 되는 특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였죠. 우리는 이 발명을 '새벽 3시 발명'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만큼 너무 빨랐다는 거죠."라고 한 바 있다. 아이폰이 처음으로 출시된 것이 2007년 6월 29일이었으니 히로시가 얼마나 앞서 갔는지 알 수 있다. 히로시의 발명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사진기로 찍을 수 있도록 한 발명이었다. 아래 히로시의 특허 도면에서 32번으로 표시된 부분이 볼록 거울이다. 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이용해 자신을 사진에 담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는 파리 여행중 루브르 박물관에 들렀고, 어느 소년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그 소년이 카메라를 가지고 도망친 사건을 계기로 셀카봉을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히로시의 발명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이후 카메라를 지지는 장치와 그 장치의 사용방법에 대해 특허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캐나다의 웨인 프롬(Wayne Fromm)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한 장난감 회사의 직원이었는데, 셀카봉을 개발한 후 이를 직접 생산하여 판매하였다. 웨인이 지은 당시의 제품 이름은 '퀵 포드(Quick Pod)'라고 이름이었고, 이 발명을 특허출원하게 된다. 그의 특허는 "카메라를 지지하는 장치 및 그 장치를 사용하는 방법(Apparatus for supporting a camera and method for using the apparatus)"였고, 2005년 5월 미국특허청에 특허출원을 하였고, 이것을 기초로 하여 부분계속출원(continuation-in-part; CIP)을 2006년 11월 7일 하여 이를 2010년 3월에 등록받는다. 부분계속출원은 이미 출원을 한 발명에 일부 추가 또는 개량한 부분이 있다면, 원래의 특허출원한 날짜를 유지한 채로 새롭게 개량 또는 추가된 발명을 포함하여 출원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는 미국의 제도이지만,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등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특허출원 후 1년이 경과하기 전이라면 원출원의 날짜를 유지하면서 우선권 주장을 하여 출원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출원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발명이 완성되면 출원을 먼저 하여 출원일을 확보해 놓고, 이를 추후 보완하여 완전한 출원으로 할 수 있는 유용한 제도이다.
웨인은 미국에서의 특허출원에 이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에 출원을 하고 싶었으나, 그 비용이 10만 달러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미국과 캐나다에만 출원을 하게 된다. 한 나라에서 출원이 적법하게 이루어지면, 이 출원을 기초로 해당 출원일로부터 1년 내에 전 세계 각국에 출원을 하여 특허를 등록받을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가입하고 있는 파리협약(Paris Convention)에 규정되어 있어 출원인이 여러 나라에 동시에 출원하지 않아도 1년 내라면 동일한 출원을 할 수 있게 된다. 웨인은 비용 문제로 인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출원 및 등록을 포기한 것이다. 특허는 각 나라마다 그 제도가 조금씩 다른 점이 있고, 한 나라에 등록된 특허는 그 나라에 한하여 권리로서 효력이 발생한다. 이는 속지주의(屬地主義)원칙에 따른 것으로, 각국 특허독립의 원칙이라고도 한다.
웨인은 셀카봉 특허와 그 제품으로, 2006년 출시 이후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웨인은 퀵 포드 제품을 100만개 이상 판매하는 실적을 올렸으며, 2014년 미국 타임(Time)지가 선정한 최고의 발명품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업체들을 중심으로 소위 짝퉁 제품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켓 리서치 퓨처(Market Research Future)에 의하면, 2016년 기준 전 세계 셀카봉 시장은 8천만 달러에 이르지만 웨인이 얻고 있는 이익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웨인의 특허권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웨인은 자신과 딸이 같이 세운 회사인 프롬 웍스(Fromm Works)를 통해 미국에서 셀카봉 관련하여 유사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소매상들을 대상으로 저작권 침해소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특허권은 등록된 나라에만 효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제품을 보호하고 이로부터 수익을 정당하게 얻기 위해서는 시장이 있는 주요 나라들에 특허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에는 기술 중심의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startup)들이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특허권을 여러 나라에서 확보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웨인이 중국에 특허권을 확보하고 있다면, 세계에서 셀카봉을 제일 많이 생산하는 중국에서 제품을 판매하거나, 중국업체들과 라이선스(license) 계약을 체결하여 로열티(royalty)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웨인은 더 큰 억만장자의 대열에 들어섰을 수도 있다. 웨인의 특허는 2005년 출원되었으므로 그 권리의 유효기간은 2025년까지(특허권은 출원일로부터 20년이 되는 날까지 유효함)이니, 향후에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앞선 히로시의 예를 보면, 특허권의 확보가 반드시 사업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획기적인 발명을 하여도 이를 뒷받침할 시장이나 기술이 따라오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허를 확보하고도 이를 사업화하거나 제품화하지 못 하면, 특허권은 비용만 드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항상 발명을 한 경우 이를 특허권으로 확보하는 것이 전체 비지니스 전략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할지, 관련 기술이나 시장의 상황이 어떤지를 면밀히 체크하여 적절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히로시가 자신의 발명을 출원하지 않고 영업비밀(trade secret)로 잘 관리하다가 제품이 시장에서 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 시기에 적절히 특허권의 등록을 받았다면, 지금 웨인의 위치에 히로시가 서 있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언급하자면, 히로시는 일본과 미국에 특허출원을 하나씩 하고 더 이상의 조치가 없었던 반면, 웨인은 미국에 먼저 출원을 한 다음, 이를 개량한 발명을 일부계속출원 제도를 이용하여 출원한 것이다. 미국은 일부계속출원(CIP application) 외에도 계속출원(continuation application)이나 분할출원(divisional appication)이라는 제도가 있다.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개량발명을 보호하기 위한 출원인이 이용할 수 있는 제도들이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우선권 주장 출원이나 분할출원(위의 그림 참조) 등을 인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특허출원의 전략은 시장의 상황과 기술의 발전 속도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발명의 개량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여러가지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단순히 발명을 하고 이를 특허출원 했다고 만사형통이 아니다. 출원을 한 다음에도 이 출원된 발명의 개량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권리의 유효기간을 더 늘일 수 있는 출원을 할 여지가 있는지 등에 따라 나중에 그 특허를 통해 수익화할 수 있는 정도가 천지차이가 될 수 있다. 히로시와 웨인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