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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Aug 04. 2023

꼭 읽으라던 필독서 목록, 알고 봤더니…

현기증이 났다. 뒤통수를 제대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든 책을, 다시 내려다본다. 확인한다.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분명 그렇게 쓰여 있다. 놀랍다.

마침내 알았다. 내가 그동안 책을 읽을 수 없었던 이유.


이내 자신감이 생겼다. 활자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 확실히 들었다.


반드시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이동진 독서법> 36쪽


누군가에겐 너무나 당연했을 이 한 문장이, 나에겐 특효약이었다.




초등학생 필독서. 청소년 필독서. OO대학교 선정 필독서. 필독서 필독서…. 그놈의 ‘필독서’가 문제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책 리스트들. 이런 책쯤은 ‘반드시’ 읽어야 마땅한 것처럼, 그러지 못하면 뒤처지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나는 거기에 영향을 정말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하니 일단 펼쳐 본다. 읽히지 않는다. 재미도, 의미도, 감동도 없다. 그렇다고 다 읽지도 않은 책을 덮어버릴 수도 없다. ‘필독서’니까.


책에게 진 것 같은 패배감. 나만 이 책을 모른다는 부끄러움. 오기가 발동한다. 꾸역꾸역 책장을 넘긴다. 그렇게 책 한 권을 가지고 한두 달 씨름한다. ‘필독서’니까.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만 남는다. 책 읽는 속도, 점점 느려진다. 기가 죽는다. 나를 탓한다. 책은 잘못이 없다고 느낀다. ‘필독서’니까.

십수 년 동안 내가 반복해서 겪어왔던 악순환이었다. 당당히 활자와의 이별을 선언하고 살아가면 되지 않냐고? 그 또한 다양한 삶의 형태 중 하나겠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수능, 대학생활, 취업을 거치며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활자울렁증은, 나에게 생존의 문제였다는 걸.


그 와중에 독서법에 대한 책을, 그것도 <이동진 독서법>을 읽었던 건 신의 한 수였다. 무엇보다 ’완독에 대한 부담‘을 덜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저의 서재에는 물론 다 읽은 책도 상당하지만 끝까지 읽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서문만 읽은 책도 있고 구입 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도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는 것, 서문만 읽는 것, 부분 부분만 찾아 읽는 것, 그 모든 것이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13쪽)

완독에 대한 부담감을 버리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33쪽)

책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미안해할 것도 아니고 부끄러울 일도 아닙니다. 다 읽지 못한 책을 책장에 꽂아둔다고 큰일 나지도 않고요. (중략) 그저 안 읽힌다면, 흥미가 없다면 그 책을 포기하시면 됩니다. 굳이 완독 하지 않아도 됩니다. (34-35쪽)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고 해도,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강추’한다고 해도 내가 읽을 때 재미가 없고 안 읽힌다면, ‘아님 말고’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저는 인생에서 꼭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99명이 권해도 한 명인 내가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책에서 흥미를 느껴야 한다는 거죠.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반드시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35-36쪽)


문득 대학생 시절이 생각난다. 도서관에 가서 호기롭게 책을 빌리면서도, 반납할 땐 쭈구리가 됐다. 대출 기한을 연장하기까지 했는데도 다 읽지 못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책을 완독 하지 못했다는 건 나만 아는 사실인데, 괜히 부끄러웠다. 도서관 반납 창구에서 일하는 근로장학생이 눈치채는 건 아닐까. 별 게 다 신경 쓰였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된다. 한 번에 네다섯 권씩 막 빌려 볼 걸. 조금씩 읽고 반납하더라도, 맘 편히 도서관을 누벼 볼 걸.


괜찮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지금은, 끌리는 책이 있다? 일단 산다. 무조건반사처럼. 용돈이 허락하는 한, 망설이지 않는다.


책이 한동안 방치 돼 먼지가 쌓여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다 때가 있겠지. 저절로 손이 가는 책부터 조금씩 읽는다. 재미없으면? ‘이 책은 나한테 안 맞는구나’ 하고 다른 책으로 옮겨 간다.


그러다 보면 알게 된다. 내 취향이 뭔지. 내가 대체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어떤 건지.


인정하게 된다. 아무리 유명한 책일지라도, 나는 재미없게 느낄 수 있다는 걸.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님 말고’식의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책 말고도, 삶 전반에 걸쳐서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내 생각’은 어떤지 먼저 물을 수 있게 됐다. 언제나 확고할 순 없지만, 주변 상황에 휘둘리는 일이 줄었다.


남들이 아무리 안 좋은 이야기를 해도 ‘난 괜찮은데?‘라며 반응하고, 모두가 좋다고 해도 ’그래도 난 별로야.’라고 느끼는 걸, 더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같지 않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래, 그럴 수 있지.’와 같은 자세는 사람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와 걱정을 덜어주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문장의 뒷부분을 이렇게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책을 대하는 태도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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