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다 가스 점검 오셨네

언니의 집안일 2

by 별별


서울에 올라와서 한동안 내가 한 일은 집정리였다. 동생은 직장을 다니느라 집을 돌볼 여유가 없었고 2년 동안 은근히 쌓인 지저분한 것들이 많았다. 동생이 출근하면 나는 '뭐 치울 것 없나~'하고 먹잇감을 찾는 백수(의 왕)언니였다.


그날은 책상 정리였다. 책들 사이에 뜬금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무더기 우편물을 발견했다. 동생은 봉투를 뜯지도 않고 그대로 놔두고 있었다. '그래도 용케 우편함에서 가져오기는 하는구나.' 보아하니 카드사에서 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동생이 정기후원하는 뉴스레터도 있고 관리비 고지서도 있었다.


관리비 고지서를 뜯어 보자

관리비가 이상하게 많이 나오는 느낌이었다. 이제보니 십 만원이 다 되어가는 적지않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고지서를 보니... 새삼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관리비, 그리고 더한 월세까지 모두 동생이 내고 있다.


내가 직장에 다니던 시절, 우리는 월세를 반씩 부담했다. 하지만 관리비는 지금까지 항상 동생이 내 왔다. 동생이 더 수입이 많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자기가 내겠다고 한 것이다. 동생은 관리비, 나는 인터넷 요금과 기타 생필품을 사는 것으로 우리는 합의했던 것 같다. 대충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관리비가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동생이 더 수입이 많다는 사실은 반드시 동생이 더 비용을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동생은 항상 언니보다 더 내려고 했다. 함께 외식을 할 때도 동생이 카드를 꺼내고 함께 카페를 갈 때도 자기 카드가 할인되는 거라며 계산을 했다. 언니인 나는 동생보다 수입이 적은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편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염치없게도.


지금은 심지어 언니가 동생보다 수입이 적은 게 아니라 언니의 수입이 아예 없다. 우리는 관리비나 월세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동생이 모두 부담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실, 돈 잘 버는 동생이 돈 다 내기. 백수 언니는 백수라서가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저 착한 동생을 만나서 고마울 뿐이다.


책상정리를 하면서 또 발견한 것.

몇 장이나 겹쳐진 스티커 종이를 발견했다. 도시가스 안전 점검을 하라는 안내였다. 벌써 세 장째다. 가스 점검하시는 분은 첫 번째 방문하고 이 스티커를 남기고, 두 번째 방문하고 또 스티커를 남기고, 세 번째 방문했는데도 사람이 없어서 스티커를 남겼나 보다.


급기야 짠한 마음이 들었다. 매번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을 가스 점검원과 퇴근하고 돌아와서 매번 문 앞에 붙여진 이 스티커 종이를 발견했을 내 동생, 둘 다에게 연민을 느꼈다. 가스 점검은 해야되겠고 정작 입주민은 출근을 해야 되겠고, 각자 바쁘게 맡은 일을 해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복해서 지지부진하게 꼬리를 물어왔던 상황을 내가 정리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장 종이에 적힌 휴대폰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000호입니다. 집에 항상 없어서 죄송해요. 오늘 방문해 주시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치 그 전에 살던 사람인 것처럼. 그러자 조금 뒤에 문자가 왔다.


12시 전으로 갈게요.


그때가 11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다. 가스 점검원은 기다렸다는 듯 방문하겠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아니, 기다린 게 맞다.


손님을 기다리는 듯 설레는 마음마저 들었다. "딩동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반갑게 문을 열어드렸다. 친근한 인상의 아주머니셨다. 점검원 아주머니도 내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셨다.


오늘은 계시네요.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지금껏 집을 비운 바쁜 직장인 동생 대신 이제 서울에 얹혀살게 된 언니가 드디어 문을 열어드리게 됐다고 굳이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기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침 시간에 집에 있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돈을 안 번다는 핑계로 관리비 한 푼 보태지 못하는 언니지만, 집에 있다는 핑계로 이렇게 가스 점검을 대신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가스 점검은 5분도 안 되어 끝났다. 이 간단한 작업이 며칠 동안 바쁜 두 사람을 번거롭게 했다. 나는 그 수고로움의 고리를 끊어낸 뿌듯한 백수였고.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한가한 제가 대신 가스 점검 받겠습니다.
30.01.19.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