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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Dec 06. 2021

사라진 순수의 시대


오랫동안 조용하던 대학 동기 카톡방이 되살아났다.


R의 부친 000 님께서 2021년 11월 30일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알고 보니 R 언니를 빼고 새로 만든 단체 채팅방이었다.


고인명

빈소

소천일시

발인일시


문자를 읽자마자 그대로 꺼버렸다. 하지만 차마 진정시키지 못한 가슴이 꺼진 숨처럼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외면했지만 금세 또다시 폰을 켜 들고 있었다.


- 내일모레 발인이니까 갈 수 있는 사람들은 내일까지는 가야 해.


카톡방을 만들고, 부고를 전해준 동기 오빠는 그것도 모자라 우리 과 이름으로 화환을 보내겠다고 알렸다. 그는 척척 꽤나 능숙하게 현재 우리에게 닥친 상황을 손쉽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 줄줄이 동기 오빠한테 고마워하는 메시지가 달렸다.


부고가 전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망자는 이미 떠났다. 남은 것은 눈을 뜨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으라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까 오빠의 말처럼 언니의 아버님 장례식장에 가느냐 마느냐, 언제 가느냐의 문제에 결정을 내리는 거였다.



R 언니


어느새 언니랑 함께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지금이랑 똑같이 추웠고, 지금이랑 다르게 초봄이었다. 언니는 삼수를 하고 들어왔기에 우리에겐 왕언니 또는 왕누나로 불렸다. 우리 과는 그 안에 조가 따로 있어서 우리들은 약 열대여섯 명 정도 같은 조라는 이유로 뭉쳐 다녔다. 애초에 조장은 따로 정해졌지만 무슨 결정이든 똑 부러지게 내리는 바람에 실질적인 조장은 R 언니였다.


언니는 뭐든 잘했다. 공부도 잘했고 오랫동안 연애하던 남자 친구도 있었고, 심지어 게임도 무척 잘했다. 무슨 게임 동호회에 가입하고 그 안에서도 게임을 정말 잘해서 남자 동기들은 R 누나를 정말 깍듯이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언니는 머리가 아주 길었고 옷을 참 잘 입었다. 나를 포함해 동기 여자애들이 촌스럽게 신입생 티를 벗지 못할 때, 언니는 그게 답답했는지 자주 미팅을 앞두고 우리들에게 화장을 시켜주곤 했다. 가끔 엄마께서 주셨다는 명품 화장품이나 명품백을 들고 오기도 했는데, 그때 난 명품이란 걸 처음 구경해보았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R 언니는 어쩐지 좀 신비로운 존재,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랑 마음속으로 깊이 친해지진 못할 것 같단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냐면 언니는 우리랑 같이 노는 게 아니라 우리랑 놀아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언니가 몇 년 전 연락해온 적이 있었다.


대개 결혼을 앞두고 뜬금없이 연락이 오는데 -언니는 몇 년 전에 이미 결혼도 했는데-  잠수를 탄 것처럼 조용히 지내고 있는 나에게 무슨 볼 일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언니는 아무런 용건이 없었다. 정말로 내 안부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 잘 지내?... 언제 한번 보자, 보고 싶어..


언제나 그렇듯 나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에 언니는 결혼, 직장, 모든 게 완벽했고 그래서 괜스레 추억에 젖어 보고 싶다 말하는 언니의 말이 어쩐지 사치스럽게 들렸던 것 같다. 이담에 서울 올라가면 연락하겠다고 무심코 얘기해버렸다. 그 후로 몇 번이나 서울에 갔었지만 언니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와서 그 마지막 대화가 생각났다. 지키지 못할 약속, '밥 한번 먹자'와 같은 말을 해버렸던 것이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친상


우리 나이 또래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일은 드물지만 그러고 보면 종종 친구들의 모친상을 겪어 왔다. 바로 몇 달 전 중학교 동창의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몇 년 전에도 어느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적이 있다. 나는 깜짝 놀랐고 그때마다 달려갔다. 어떤 날은 연락을 받자마자 너무 빈소에 일찍 도착해서 아직 세팅이 되지 않은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을 기다린 적도 있었고, 일이 끝나마자 저녁에 지방에 내려가서 친구의 빈소를 밤새 지킨 적도 있었다.


그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아니 그저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쁜 일에는 나 말고도 축하해줄 사람이 많을 것 같지만 슬픈 일에는 나 한 사람이라도 더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친구와 함께 울고, 조의금도 무리해서 내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최선을 다해 위로해줬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내가 그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 엄마는 정말로 건강하게 살아계셨으므로.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가증스럽지만 누군가의 슬픔이 누군가에겐 참 다행으로 느껴졌다.


R 언니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단 소식은,


한편 이번에 어느 부친상 부고를 듣고도 나는 놀라우리만치 침착했고 이상하리만치 놀랍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침잠하고 있었다. 아빠께서 편찮으신 가운데 누군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으로 나를 밀어내리는 것 같았다. 왜 하필, 왜 자꾸, 왜 이런 소식이. 짜증까지도 나는 것 같았다. 평온한 일상의 반대편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리고 현실 속에는 우리 아빠마저도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심각한 병환이 존재한다. 그렇게 원래 있던 곳-있어야만 하는 곳-으로 나는 다시 돌아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 낯선 '부친상'이란 게 실제로 내 눈앞에  있었다.


언니의 아버지께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도 뵌 적 없는 R 언니의 아버지는 갑자기 우리 아빠와 겹쳐 보였다. 상복을 입고 있을 언니의 모습에 내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나는 언니의 슬픔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소나기처럼 닥쳐오는 불안과 슬픔에 갑작스레 온몸이 젖는 느낌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울면서 떨고 있을 언니의, 아니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구차한 고민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단톡방에 메시지가 하나 떴다.


- 다들 잘 지내시나.. 나는 지금 병원에 다니고 있는 중이라.. 내 몫까지 부탁해요..


동기 J 였다. 자신의 지병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친구.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프로필 사진은 골프 샷을 날리는 모습이었다. J의 프사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그리고선 휑하니 카톡방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황망했지만 한편으론 대학 시절부터 우리와는 따로 놀던 그였기에, 원치 않는 초대에 엮이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 하고 어쨌든 이해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못했다.


단톡방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일단 버스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요즘은 서울에 갈 일이 없어 지워놓았던 고속버스 앱을 다시 깔고... 지금 당장 서울에 올라가면... 오후 4시 차를 타고 가면... 장례식장에는 한 오후 9시쯤 도착할 것 같았다. 차라리 경부고속터미널 말고 동서울터미널로 곧바로 갈까?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차는 하루에 세 대밖에 없었다. 그럼 밤늦게 도착해서, 그러고 나서, 서울에서 한 밤 자고 그다음 날 아침에 내려와야겠지? 그다음 날 제일 빠른 차편을 검색해 봤다. 이래저래 하면 내일 오후쯤 집에 도착하겠구나...


엄마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엄마, R 언니라고 대학 동기 중에...  언니가 상을 당했다네요."

"누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가볼려고요."

"...... 서울 아니가? 그까지?"

"그래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코로나도 심하다던데."


수도권에서 코로나 확진자 수가 한창 상승세를 달리고 있단 뉴스를 그제서야 기억해냈지만, 그게 이유가 될까 싶었다. 그래도 항상 친구가 상을 당하면 가보는 게 예의였는데.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너무나도 무심하게 상황을 정리해 버리는 엄마가 좀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나도 강하게 주장하진 못했다. 오히려 엄마의 말씀을 들으니, 코로나에 자칫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내가 우리 집에 바이러스를 몰고 와서 아빠께서 위험해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선명해졌다. 게다가 옛날부터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조문을 가지 않는 거라고 하셨다. 왜요? 귀신이 오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오늘날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더 직접적이긴 하지만, 아마도 면역력이 약한 환자에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낯선 병균 등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말이 있어왔던 것이었겠지.


장례식장에 가려고 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오버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새삼 서울까지 가기엔 너무 멀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심지어 부친상인데, 하지만 또 누구보다도 우리 아빠가 지금 편찮으신데, 남의 집 조문을 일일이 챙길 땐가. 하지만 그래서 더 남일 같지가 않은데. 선뜻 결정하기 힘들었지만,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듯 이렇게 고민하는 그 자체로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다른 동기들은 언제 올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 E야, 언제쯤 장례식에 갈 생각이야?


그나마 대학 동기들 중에 유일하게 자주 보고 지내던 친구였다. 하지만 요 근래 몇 년 동안이나 E를 본 적도 없긴 했다. 그녀는 아기를 낳았고 아기의 돌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장례식장 바로 근처라 당연히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올 것 같지 않았다. 알고 보니 모유수유를 하느라 백신을 맞지 않아서 장례식장에 가는 게 고민된다고 했다. 게다가 남편이 저녁에 대학원에 다니느라 당장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 S야, 나는 사실 고민 중인데.. 너는 언제 갈 예정이니?


대전에 사는 S는 남자 동기들 중에 연락을 하는 친구다. 연락이라고 해봤자, 한 십 년 만에 어느 시험에 합격했다며 반가운 전화를 해준 게 다였지만. 텅 비어있던 대화방에 이런 일로 새삼스럽게 문자를 보낸다 싶었다. 아무튼 옛날부터 그는 선배들, 형들 끔찍이 챙기던 친구였다. S는 당연히 가겠지. 갈 수 있겠지.  


- 잘 지내?

아니 못 갈 거 같아서 가는 사람 찾아서 봉투 부탁하려고.


아. 차라리 물어보지 말 걸.


애초에 나의 계획은 물거품 되어버렸다. 어쩌면 나는 그들이 나를 보고 함께 가자고 말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초라하게도 나는 이미 장례식에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마음이 기울었으므로, 당연히 갈 법했던 동기들에게 연락해서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고민했던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떠밀려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는 말, 물론 비겁한 변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순수했던 시절


장롱나에게, 처음으로 내 운전 면허증이 요긴하게 쓰였던 적이 있다. 예전에 우리는 어느 승합차를 빌렸는데 거기서 대여 조건이 운전면허증 소지자가 2명 이상이고, 운전자는 1종 면허에 운전 경력 1년 이상이었던가 그런 조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2종이긴 했지만 내 운전면허증까지 합해 큰 승합차를 빌릴 수 있었다. 우리는 그걸 타고 밤늦게 강화도를 갔었다.


어두운 밤길, 서툰 운전 실력으로 번갈아가며 몇 시간 동안 강화도까지 달려갔던 이유는 다름 아닌 어느 후배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왕복으로 상갓집에 다녀오느라 거의 밤을 새웠다. 그때 조의금은 얼마를 내야 할지 몰라 다 같이 합해서 정말 몇 푼 안 되었던 돈을 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봉투가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도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으므로. 산적같이 생기고 웃기기로 소문났던 그 후배가 처음으로 부운 눈으로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때의 그 안쓰러웠던 얼굴을 그 눈물 닦아줄 수 있었어서 다행이었다.


새삼 그때 생각이 났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기억이지만, 불안하고 어두운 고속도로 위에서 잔뜩 김이 서린 승합차. 하도 깜깜해서 거기가 강화도 어디매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저 우리는 반은 너무나도 무거운 마음으로, 반은 그래도 조금은 뿌듯한 마음으로, 함께 (그당시엔) 큰 일을 치렀던 것만 기억난다. 우리는 참 어렸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갔다. 고민할 필요도, 다른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알 수 없이 복잡한 마음에 무작정 걸으러 나왔는데, 슬픔과 아쉬움과 후회가 뒤섞여 주변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냥 자동으로 발이 움직이 머릿속으 참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앞을 가렸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그날 난 장례식장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나의 변명거리들을 마음속에 꺼내 펼쳐 놓았다. 장례식장에 가지 않을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장례식장에 가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들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려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택했던 것이다. 가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작정 장례식장에 달려가던 그런 아이가 아니다. 마음이 늙어버렸고 쪼그라들었고 사그라들었고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크나큰 슬픔보다는 각자 개개인의 사정이 더 중요하게 되어버렸고, 거기에 별다른 살을 붙이지 않아도 좋을 만큼 그러려니 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변해 버렸다. 내가 변한 것이다.














R 언니.


당장 달려가서 언니를 안아주어도 모자랄 판에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이곳에서 언니 생각을 해.


아버님 소식이 너무 안타까워서 어젠 하루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어.


부디 언니가 너무 힘들어하느라 너무 힘들지 않기만 바랄 뿐이야.




사실은 지금 우리 아빠께서도 건강이 많이 좋지 못하셔.


암 투병 중이시라 아산병원에 다니고 계시거든.


아산병원 장례식장이라길래 더더욱 남일같이 느껴지지 않더라.


무섭고 두려워졌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인 것 같아.


아직도 지금은 언니 맘을 헤아리진 못하겠지만 어쩌면 훗날 언니 맘을 이해할 수도 있을지도 몰라.


언니, 그래서 더 언니를 위로해 주고 싶었어.


그치만 또 애써 부정하고 피하고 싶어.


너무나도 복잡한 생각과 마음으로 언니를 생각하고.


또 한 번도 뵙진 못했지만 언니의 든든한 그림자였을 아버님을 상상해.


부디 가시는 길이 편안하시길 기도해 보아.




R 언니, 우리 언니.


장례식장에 가서 언니를 위로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대신 멀리서 언니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어요.


언니와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을 보태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잘 배웅해드리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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