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이 어지럽다. 아까 내팽개쳐두고 온 이불보다 더 묵직한 종이 뭉치들이 사방에 널렸다. 시계는 숨죽이며 나를 주시하고 있다. 새벽 5시 40분.
요즘 들어 쉬이 잠들지 못한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으나, 오늘처럼 심한 건 아녔다. 그래도 항상 30분 정도 뒤척이다 만 것 같은데... 오늘은 이상하다, 새벽 내도록 잠들지 못한 이유가 뭘까. 아마도 저녁잠을 잤으니까 그런 거겠지.
깨어난 건 새벽 1시였다.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설거지를 안 했네'였다. 카레가 묻은 그릇이었다는 걸 알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예전에 나무주걱을 카레에 담가놨다가 노랗게 물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벽에 설거지를 하기엔 소리가 시끄러울 것 같았다.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곤 쿨하지 못했다. 좀체 설거지를 미룬 적은 없었기에 기분이 많이 찝찝했다. 주방을 서성거리다 물 한 컵을 정수기한테 얻어 먹고 나서는, 그러나 고개를 돌렸다.
저녁잠
저녁에 잠든 건 몇 시쯤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열 시가 넘었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브라운관 속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자다가 문득 까-만 화면을 보고선 다시 잠든 것 같다. 다시 돌려보면 어디까지 보았는지 알 수 있을까. 분명히 '영화가 너무 좋다'라고 마음속으로 열 번은 더 외쳤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자버렸다니...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오랜만에 보았다. 영화 '마지막 황제' OST 등 몇 소절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한 음악을 작곡한 인물, 류이치 사카모토 씨, 난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암으로 최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석별의 감정을 품고 한동안 그의 플레이리스트를 달고 다닌 적이 있다. 그저 내가 슬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구매해 놓은 영화를 오랫동안 묵혀두고 보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열어보게 된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코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인물과는 많이 달랐다. 아주 진중하고 멋있고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마음에 드는 소리 하나를 얻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어서, 뭐랄까, 그저 다행이었다는 마음이라고밖엔.
우울감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온통 유튜브 재생목록, 그리고 각종 코미디 영화목록을 뒤지고 있었다. 눈과 마음이 어지러웠다. 무언가를 찾아 나섰지만 아무도 없는 사막을 걷는 기분으로 우울함이 눈앞을 가릴 뿐이었다. 객관적인 사실만 보자면 내가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 꼭 이렇게 밤만 되면 다시금 깊이 가라앉는 것이다. 얼른 다 나았다고 내 맘대로 규정하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함에 매일 작은 좌절감을 맛봤다. 조금씩 쌓이다 보니 내가 걷어내지 못할 만큼 커다란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밤마다 어둠보다 침묵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던 것은 잠들지 않는 공허함이다.
다시 아침
내일은, 아니 오늘은 엄마가 올라오시기로 했다. 솔직히 그래서 긴장되는 마음도 있었다. 뒤척뒤척이며, 애꿎은 설거지를 마음에 담아두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큰일이네, 엄마가 내일 올라오시는데.'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기다리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어서 엄마가 오시기 전에 설거지를 끝내 놔야지. 구질구질한 건 내 마음만으로도 충분할 터, 티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언제나 엄마에겐 들키기 마련이라 무척 노력해야 한다. 그 시작은 집을 깨끗하게 해 놓을 것. 책상도 좀 정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비로소 먹게 된다.
그래도 해가 뜨니 고맙다. 비록 미세먼지가 많다고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차라리 바깥의 먼지가 더 견딜 만한 모양이다. 남들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내 나름대로는 하루종일 바쁘게 지낼 예정이다. 밤을 새웠으니 조금은 힘들지 모르겠지만 그 보상으로 이른 잠을 잘 수 있다면 그건 매우 달콤하겠지. 쓰러져 자더라도 곧장 잠에 들 수 있다면. 오늘은 단 한 가지 소망으로 하루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