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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목도리를 찾아서

by 별별


2024년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12월 31일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건 바로 ‘1년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먹고 자고 해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으니 아무거나 정도는 한 게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어 2024년을 반추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왜냐하면 어떤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딱히 사진도 글도 남긴 게 없어 SNS나 블로그에서도 스스로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늘 책상 한편을 차지하던 일기장도 빳빳한 백지만 가득해 더 말할 나위가 없고.


그런 와중에 목도리를 잃어버렸단 게 마음에 걸렸다. 어제 버스에서 내린 직후, 있어야 할 목도리가 없어진 걸 발견한 것이다. 요즘 황망했던 탓인지 한낱 사건이 내게는 점점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왜 나는 부주의할까.’

‘몇 년 전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나서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선 또.’

‘매사에 무신경하고 대충대충 사는 습관이 이렇게 매번 일을 벌이는구나.’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허술하고 구멍이 난 사람처럼 굴게 되겠지. 난 도대체 싹수가 노란 잎이네. 가망이 없어.’


어느새 목도리 하나가... 내 과거의 잘못과 미래의 걱정까지 아울러 나의 모든 과오로 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왜 옆에서 길을 찾아주지 않고 내가 앱으로 환승을 찾아보느라 목도리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냐며 옆 사람을 탓하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옆 사람은 바로 내게 목도리를 선물해 준 남편이었다.


터덜터덜 걸어오면서, 몸에서 분리된 영혼이 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스스로를 괴롭히며 과하게 나를 탓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신호등을 기다리고 횡단보도를 다 건너갈 때쯤, 그제야 영혼이 돌아왔다. 무엇보다 먼저 목도리를 찾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지도 앱을 켰다. 방금 지나간 버스 번호를 입력하자 노선 정보를 눌러볼 수 있었다. 방금 지나간 버스가 지금 어느 정류장을 거쳐가고 있는지 보였다. 당장 해당 운수업체에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방금 내린 버스에서 물건을 두고 내렸는데요! 혹시! 찾을 수 있을까요??”

“네~ 몇 번 버스 타셨는데요~”


다급한 내 목소리와 달리 세상 느긋한 수화기 너머 상대방 목소리를 듣자, 잠시 딴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담당자분은 차분하게 버스 번호와 분실물 내용, 목도리 색깔까지 물어보고 나서, 기사님이 운행 중이니 좀 있다가 연락을 주신다는 말씀과 함께 통화를 끝냈다. 정말 이게 다인가 싶을 정도로 분실물 신고는 싱겁게 끝났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제저녁, 낯선 02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네~ 목도리 들어왔어요~”

“앗! 어디로 찾으러 가면 되죠??”

“네~ 강동공영차고지로 오면 됩니다~”


이렇게 목도리 사건은 종료됐다. 그날 저녁 목도리가 진짜로 들어온 것인지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지만 다음날 부리나케 차고지로 달려가 보니 '정말로' 있었다. 설마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설마 찾고 보니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랄까. 옛날에 고속버스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때랑은 전혀 딴판이었으니까.


수중에 다시 목도리를 품고 집에 돌아오는 길, 오늘은 2024년 12월 31일이었다. 하필이면 썰물같이 흘러가버려 허무했던 한해의 마지막 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다는 사실은 괜히 의미를 부여하고 싶게 만들었다. 목도리도 이참에 새로 한번 빨고 나니 더 보송보송 예뻐 보였다. 버스에서 누군가의 발에 치였을 목도리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더더욱 내 물건이고 더욱더 애틋한 느낌이다.


목도리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때론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 많은 자책을 하진 않도록 하길."

"나쁜 일은 운이 나빴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일은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는 게 대부분 삶의 이치가 아닐까 하고."

"때문에 나쁜 일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며 천착할 필요 없고, 좋은 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서 헤쳐나간 것이라고 겸손해 하기.”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은 경험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진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새해 첫날을 기념해서 잃어버린 내 안의 무언가를 찾아야겠다는 열망이 든다. 어쩌면 이 글을 쓰게 된 건 잃어버렸던 목도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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