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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Nov 21. 2021

개방적이지 못한 딸의 옷차림, 그걸 바라보는 아빠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사소한 말다툼은 결국 서로 언성을 높이던 도중에 끝났다. 모처럼 읍내에서 소고기 국밥을 잘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말이다.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아빠와 딸 모두 누구 하나 잘못한 것 없다고 생각하기에 누구 하나 사과하는 이 없고, 집에 돌아와서도 냉랭한 기운뿐이다. 중간에서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딸 때문에 엄마는 잔뜩 서운해하셨다.


 이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화가 난다. 나는 아빠한테 화를 내지 마시라고 해 놓고,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내 언성이 높아지는 걸 지적하며 정작 화를 내고 있는 건 나라고 말씀하셨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빠께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어쨌든 내가 먼저 흥분한 건 맞으니까. 방에 들어가서도 문을 닫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아빠는 TV를 켜셨고 그 TV 소리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시간이 가길 바라게 되었다. 아빠는 TV에 열중하시는 듯 보였지만 정말 그런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고, 그렇게 나 홀로 눈치만 보고 있던 와중에 마침내 아빠는 방에 들어가셨다. 아까의 시간은 애써 회피한 보람이 있는 것처럼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사건의 발단은 옷으로 엉덩이를 덮느냐 마느냐였다.


내가 "엉덩이가 보이는 옷은 원래 안 입거든요."라고 무심코 말했다가,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아빠가 생각하기에 "내가 너무 꽉 막혀있다"는 것이고 나로서는 "아빠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왜 안 입는데?" 


아빠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첫째, '엉덩이 콤플렉스' 때문이다. 


사실 난 엉덩이를 드러내는 옷을 입지 않는다. 사춘기 때부터 지금까지, 옷을 입고 고르고 살 때마다 나를 겪었던 엄마는 다 아시는 사실. 하지만 정작 내가 직접적으로 그런 철칙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빠는 새삼 처음 알게 되셨나 보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엉덩이가 튀어나왔다는 것에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소위 말하는 '오리궁둥이'라는 것 때문에, 어떻게 하면 엉덩이를 잘 가릴까 하는 고민들로 항상 거울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일자형 교복 치마를 입을 때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엉덩이였기에, 어떤 날들은 보자기로 엉덩이로 질끈 묶고 다니기까지 했다. 커서도, 엉덩이가 드러나는 짧은 윗옷은 기피대상 1호였다.


하지만 "오리궁둥이가 뭐 어때서~!" 아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이셨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사실 엉덩이가 드러나는 게 싫은 이유는 단지 그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성적 대상화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어렸을 적, 한적한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슈퍼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집요한 눈길로 쳐다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코너를 돌아서 갈 때까지 가까스로 그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뒤늦게 뛰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 할아버지는 바지춤을 만지면서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었고, 그땐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나에게 엄습한 무섭고 불쾌한 느낌이 어떤 건지는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119 구조대' 에피소드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나를 지배하는 기억이다. 어떤 여자가 낯선 취객의 눈에 띄어 성폭행당할 뻔하고 결국 건물에서 투신해서 다친 사례였다. 나도 병적으로 그와 비슷한 상황을 기피하며 밤길을 피하고, 술 취한 사람이 보이면 돌아가고, 모르는 사람이 슬쩍 나를 쳐다만 봐도 경계한다. 어떤 낯선 이의 시선이 자칫 성적 충동을 일으킬까 봐 겁이 난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분명, 옷차림이 야하다고 해서 강간이 일어나는 것은 상관관계가 없음은 많은 연구로 밝혀졌다. 성폭력 피해자의 옷차림을 탓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선으로 여전히 성적 대상화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걷어내지 못하는 모순적인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게 내가 도드라진 엉덩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그밖에 짧거나 파이거나 비치거나 하는 그 많은 옷들을 입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좀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이다. 내가 병적으로 가리고 숨기는 거라는 건 나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결코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러모로 극도의 긴장감을 갖고 평소에 조심하고 있기 때문에,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내가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빠는 기가 차 하셨다. 내가 그토록 의미부여를 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좀 잘못됐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설사, 아주 만약에, 성폭력의 변고가 생겨도 너는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 아빠는 극단적으로 밀고 가셨다. 그러다 보니 아빠의 의도는 알겠으나 거부감이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엄마는 학을 떼셨다.



게다가 아빠는 조금 더 나아가 나의 또 다른 문제점을 언급하셨다. 


내가 연애를 못 하고 모든 남자들에게 철벽을 치는 게 어쩌면 이런 나의 성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빠의 말씀은, 옷차림이 보수적인 게 외모의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 이성관계를 기피하는 부정적인 발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이런 나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좀 더 오픈 마인드로 살아갈 것(자유로울 것)을 조언하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콤플렉스와 나의 가치관을 지켜내고 싶었나 보다. 맨날 엉덩이와 몸매를 덮는 옷만 입어야만 하는 제약(보이지 않는 선)에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이렇게 애쓰고 동동거리는 내가 너무 안쓰러운 것이다. 


단순히 개방적이지 못한 옷차림의 근원은 훨씬 더 깊고 오래되었으며, 뿌리 깊게 자라온 외적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두려움을 아빠에게서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모에 자신감을 갖고 드러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고, 또 내가 그렇게 잘못 처신하고 있는 건가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만약 아빠의 말을 인정한다면 내가 아주 잘못 살아온 게 되어 버려서, 나는 아빠의 말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엉덩이를 덮는 옷에서 시작된 사소한 언쟁으로부터, 내가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점점 더 성폭행의 위협에 대한 남성의 인지 감수성의 부재로 흘러갔고, 아빠 말씀의 핵심은 점점 더 내가 여성성을 부정하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성향과 인간관계로 흘러갔다.  


어쩌면 나는 현상의 근원에 집착하는 것이고 아빠는 현상의 극복을 통한 개선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둘 다 너무 맞는 말을 하고 있었음에도, 아빠와 딸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며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탓하고 있었다.


우선 나의 외모 콤플렉스에 대해 (옷을 안 입는 게 아니라 못 입는 걸 인정하고) 이점에 대해서는 내가 좀 더 외모에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아빠는 딸이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길 바라셨고, 거기엔 발상의 전환이나 아주 작은 용기가 필요할 뿐이란 걸 거듭 강조하셨다.  


또 몸매가 도드라지는 옷을 입는다고 해서 성적 대상화가 될 것이라는 지나친 우려 또한 그것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두려움의 대상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불안감일지도 모른다. 작은 일을 애써 큰 일처럼 만들어내지 않기를 아빠는 바라셨을 것이다.


비약적인 감이 없잖아 있으나, 아빠 말대로라면 나의 이런 보수적이고 두려움 가득한 습관이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아, 이건 정말 모르겠다.)



아무튼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국 아빠의 말씀은 딸을 생각해서 해 주시는 말씀이 맞지만... 


한편으로는 아빠가 나를 좀 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내가 왜 이런 컴플렉스에 갇혀 한 발짝도 떼질 못하는지, 왜 그것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그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게 싫어 계속 피해다니기만 했는지, 이런 마음을 좀 더 알아주셨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그런데 아빠께서 알아주지 못한다고 서운해만 할 것이 아니라 나도 좀 더 아빠를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으로 아빠는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셨고 그 때문에 놀라움이 앞선 게 아니셨을까. 나의 감정을 가지고 아빠에게 좀 더 친절한 대화로 이해시켜드릴 수 있지 않을까.



영 쓸데없는 논쟁은 아니었지만, 괜히 아빠도 나도 기분이 상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아빠께서 편찮으신 마당에 지금 이러한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들면서...) 아빠에게 먼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다니,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엉덩이를 가리든 말든 아빠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는 딸이 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언제나처럼 어영부영 넘어가지 말고, 내일 아침에는 정리된 생각을 말씀드리자.


정말 큰맘을 먹고 엉덩이를 드러내는 옷도 한번 입어보는 것이 좋겠다. 아직, 솔직히 말해서 용기가 나진 않지만, 이제 문제의식을 가졌으니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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