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1차 예방접종 한 날
꼭 어떤 일이 하기 힘들 때 기어이 하고 싶은 경향이 있다. 지금도 왼쪽 팔이 무척 단단하게 뭉쳐 제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힘들 정도로 움직이기 힘들지만, 왠지 이상하게 이런 때일수록 이런 팔일 수록, 무언가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왼쪽 팔에 피가 맺힌 스티커의 흔적. 그것은 내가 오늘 백신을 맞았다는 증거다. 정확히 아침 9시 2분에 주삿바늘을 꽂았으니, 글을 쓰고 있는 오후 9시를 가리키는 지금은 꼬박 12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다행히 팔이 아픈 것 빼곤 아직까지 아무런 별다른 증상이 없다.
조금 안심해도 되려나?
사실 백신을 맞기 전 특히 어젯밤엔 무척 긴장이 됐던 것 같다. 친구에게는 "내일 백신을 맞으려니 걱정된다. 부디 살아 돌아와서 보자"라고 농담 삼아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잘 안 쓰던 일기까지 쓰고 싶고, 그 이유는 정말이지 '백신을 맞고 나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까 봐서'였다.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했던 것일까.
기다리는 시간이 길 수록 불안감만 쌓이기 마련. 이미 접종 예약을 약 한 달 전부터 했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백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흉흉했고, 특히나 내 주변에는 완강히 백신 거부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음모론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이에게 "백신 예약했어요?"라고 한 마디 했다가, 그만 낭패를 보는 줄 알았다. 정색을 하고, 본인이 백신을 안 맞는 건 둘째 치고, 누구든 백신을 맞든 안 맞든 자유지만, 정부의 저의를 다 알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백신을 맞지 마라고 이렇게 당신(나)에게 말하는 건 호의라며, 그렇게 거듭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나는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을 모두 신뢰하는 편이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바라보고 싶었고 '중국이 의도적으로 바이러스를 살포한 것'이라든지, '정부가 모종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숨기는 게 있을 것'이라든지 하는 극단적이고 누군가의 악의를 추정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의 신뢰가 충성도라고 말하긴 힘들다. 언제든지 사실에 근거한 자료가 있다면 정부의 발표든 음모론이든 어느 쪽이든 지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단지 내가 의심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확신에 찬 주장'이다. 그 어떤 선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반론의 여지를 두지 않고 (주장을 사실이라 말하며) 믿음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그런 코로나바이러스 음모론, 백신 무용론, 몇몇 언론에서의 사망 사례 등을 접하면서 마냥 가만히 앉아서 평화롭게 백신을 기다리는 건 어려웠다.
'정말 괜찮을까?'
'젊은 층일 수록 백신 이상반응이 많다던데...'
'차라리 코로나에 걸리는 게 백신 맞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짝 극단적인 생각에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생각을 멈추게 한 건 내겐 백신을 맞아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족에게 코로나바이러스를 전염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빠께서 폐암을 앓고 계신 지금, 더욱이 가족으로서 내가 호흡기 감염병에 걸리게 된다면 혹시나 전염시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었다.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코로나바이러스를 조심하는 데에는 이골이 났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신을 어서 꼭 맞아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병원 의료진도 아니고, 60대 이상도 아니고, 30대 이상 남자도 아니고, 또 학교나 학원의 선생님도 아닌 사람의 자격으로서는 올 한 해도 무작정 백신의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잔여백신은 내 폰이 문젠지 내가 있는 지역에는 정말로 잔여량이 없던 것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도대체가 '마감/마감/마감'밖에 확인할 수 없었고...
다행히 지역 우선접종대상자로 선정이 돼 좀 더 이르게 예약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것조차, 달력 서너 군데에 적어가며 오매불망하던 예약 날에 땡 하고 마치 수강신청하듯 예약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자꾸만 "귀하는 접종 대상자가 아닙니다"라고만 뜨는 것이다. 이상하게 예약이 되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시청과 보건소 등 여러 곳에 전화를 돌려 알아봤더니, 최근에 주소지를 옮겼지만 그것이 아직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정정을 하고 다음날 우여곡절 끝에 예약을 해서 얻어낸 바로 오늘, 백신 접종 날짜였다.
막상 아플 걸 생각하니...
생각해보면 미리 아플 걸 알고 아픈 적은 드문 일인 것 같다. 그런데 백신을 맞는 것은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병원균을 내 몸에 다이렉트로 주사하는 일이다. 내 몸에게 펀치를 날려 맷집을 키우는 일을 하려니 막상 다가올 펀치가 두려워지는 것이다.
백신을 맞는 것은 더 큰 위험인 코로나바이러스를 예방할 수 있다는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덜 아플 수 있는 길이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혹시나, 어쩌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내 몸은 오롯이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이라도 이 위험을 덜기 위해, 그래서 나는 백신 접종 장소를 지역 종합 접종 센터로 지정했다.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급작스러운 상황에 긴급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병원 놔두고 왜 거길 했냐는 주변의 핀잔을 들어가면서, 굳이 30분 거리에 있는 접종센터에 방문했다.
그곳에 가 보니 확실히 달랐다. 뭐랄까. 그동안 코로나바이러스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고 실감을 하기도 힘들었던 나에게, 비로소 현실을 깨닫게 한 느낌이랄까.
종합운동장의 한 체육관에서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로 운영되고 있었고, 그래서 약간 자연재해 비상대피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구부터 비닐장갑을 끼고 선풍기 환기를 하고 1) 신분증 확인, 2) 예진, 3) 의사 문진, 4) 접종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일반 개인병원과 달리, 접종 직후 20분 동안 무조건 앉아서 대기할 수 있도록 안내된다는 것이다.
실제 대부분의 급성 알레르기 반응은 백신 접종 후 30분 이내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백신 접종 후 최소 15분~30분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접종기관에서 기다렸다가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일반적인 권고사항이었다.
접종 예약시간인 9시 이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 제외하면 정말이지 1)~4) 번 항목까지는 채 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주사를 다 맞고 나서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대기해야 하는 시각이 9시 22분이었다.
대기를 하는 동안 급성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필락시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커다란 현수막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119 구급대원들이 여러 장비를 운반하고 세팅하고 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이상 증상이 나타나는지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할 틈 없이 금세 지나갔다. 20분이 지나도 좀 더 있고 싶은데, 안내요원분은 나에게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라며 어서 집에 갈 것을 종용했다. 아쉽지만...
끝까지 안심할 수 없단 생각
나는 집에 가는 길에도 혹시 모를 이상 증상이 나타날까 봐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열이 나면 안 되니 또 빠르게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오전 햇살이 꽤나 뜨거운 것이었다. 어정쩡한 발걸음으로 태양을 피하며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한 게 아닌가.
오른쪽 눈 쪽 위로 찌릿찌릿한 느낌의 두통이 느껴졌다. 평생 거의 두통이 없던 나였는데, 아니 가만 보자, 이건 이상 증상임에 틀림없다! 사실 지갑에 고이 넣어갔던 해열제를 먹지 못해 불안하던 차였다. 집으로 오는 길, 대로변을 걷게 되어 그 흔한 편의점도 없는 길이었다. 어떡하지 근데. 머리가 아픈 것 같다.
바로 근처에 공공도서관이 있어서 얼른 정수기 물이라도 빌리려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 하필이면 도서관이 리모델링을 시작해서 지금은 전체 시설이 폐쇄 중이라고! 약을 먹지 못한 채 머리가 계속 아파오니 나는 점점 더 마음이 급해졌다.
급한 마음에, 결국 알약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최대한 밀어 넣는다는 느낌이었지만 생각보다 약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게 위험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집에 가는 길에 혹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얼마나 불안했으면...
결국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몇 컵이나 꿀꺽꿀꺽 삼켰다. 그래도 이상하게 목구멍에 걸리는 느낌이 들어 아직까지 알약이 녹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물을 끓여 그 뜨거운 물을 또 연거푸 들이마셨다. 도합 2리터는 족히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두통이나 별다른 증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그리고 밤이 되어서도 아직도 난 괜찮다. 해열제는 무사히 녹았는지 열도 나지 않고, 누군가는 가려움증이 있었다던데 아직 가렵지도 않다.
고맙게도 내 몸이 건강해서, 그리고 누군가의 피땀눈물 그리고 돈이 쏟아부어진 귀하고 비싼 백신이 좋은 성능의 것이라서, 아무튼 운이 좋아서, 이렇게 무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까지 2-3일 내 추후 경과를 지켜봐야 하고, 또 2차 백신 접종 때에도 지켜봐야겠지만, 오늘은 잘 넘긴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번 백신 접종을 준비하면서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불안함, 두려움 그리고 각종 걱정들이 꽤 많이 쌓여 있었나 보다. 맨 알약을 그대로 삼킬 정도면, 나는 참 아프기가 죽기보다 싫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이렇게 매사에 조심하면 빨리 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허, 참.
별 일 없이 다사다난했던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