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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Mar 03. 2021

MT. Whitney 등반기

백번을 가도 산은 언제나 같은 산이 아니다

하이 시에라(High Sierra)의 정점, 휘트니 

위용을 드러낸 휘트니산. 눈이 끝나는 설계면에서 정상까지는 수직 고도 450m가 넘는다.

미국 본토 최고봉인 휘트니 산(Mount Whitney, 해발 4421m)은 남다른 기억이 있다. 2011년 존 뮤어 트레일 종주를 위해 요세미티에서 출발하여 350km 걸어서 마지막 닿은 곳이 휘트니였고, 정상에서 내려다 본 광활한 하이 시에라(High Sierra)[1]는 내 가슴 속에 여전히 선연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휘트니는 알래스카의 매킨리 산(6,190m)을 제외하고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거칠지만 아름다운 하이 시에라의 정점에 우뚝 솟아있어 그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16년에는 전혀 다른 길과 방식으로 다시 휘트니에 올랐다. 이번에는 하이킹 트레일이 아니라 휘트니 동쪽 사면의 암벽 루트를 통해 클라이밍 방식으로 올랐다. 모든 산은 계절과 시간, 그리고 오르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산이 되는데, 심지어 같은 산이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5년 전에 걸어서 올라간 휘트니가 아닌 전혀 다른 산을 오른 것이다.


휘트니로 가는 길

휘트니 등반 시즌은 대부분 눈이 녹기 시작하는 6월부터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9월까지다. 우리 일행은 4월 21일 휘트니 등반을 위해 길을 나섰다. 이주영 선배가 운전하는 차는 LA를 출발하여 약 5시간만에 론 파인(Lone Pine)에 도착하였다. 론 파인은 JMT의 하산 지점이기도 한데 5년만의 풍경은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장비점까지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4월에 등반하기로 한 것은 좀더 모험적인 등반을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눈이 녹지 않는 4월까지는 휘트니 정상을 오르기 위해 사전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이고, 위험도 스스로의 책임이다. 5월 1일부터는 하루에 입산할 수 있는 등산객의 숫자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다만 퍼밋이 필요없다고 해도 안전사고 등을 대비하여 론 파인(Lone Pine)에 있는 동부 시에라 방문객 센터 (Eastern Sierra Visitor Center)에 들러 등반 계획과 비상연락처 등을 신고하고 휘트니 포털로 향하였다.


휘트니 등반을 위해서는 휘트니 포털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후 약 10km 정도 거친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해발 약 2,400m에 있는 휘트니 포털은 휘트니 트레일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존 뮤어 트레일이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설악동이나 중산리 쯤 되는 곳이다. 그러나 특별한 편의 시설이나 숙박시설 등은 전혀 없으며, 야영장과 주차장 시설만을 갖추고 있다. 본격적인 암벽등반을 위한 전진 베이스 캠프인 어퍼 보이스카웃 호수(Upper Boy scout Lake)는 약 3500m 지점에 있으므로 고도 약 1100m 정도를 하루만에 올라가야 만만치 않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아직 겨울이었다.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

첫날 일정으로 휘트니 포털에서 야영을 한 우리는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트레킹 시즌이 아닌 탓에 산길은 한산했다. 2,400m 지점이라 특별히 고소 증상을 호소하는 대원은 없었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트레일을 따라 오르다가 수목한계선인 3000m 정도 고도에 이르자 마침내 설계면[2]이 나타났다. 계곡에 쌓은 눈은 여름내내 천천히 녹으면서 수량이 풍부한 개울을 만들어 트레일을 지나는 하이커들에게 소중한 식수를 제공한다.


고도 3,000m을 올라가자 트레일은 눈 속에 파묻혀 뚜렷하지 않았으나 눈 위 발자국이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하였다. 이틀간의 야영 장비와 등반 장비를 챙긴 배낭은 무거웠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고소 증상 때문에 걸음은 더디었다. 고도를 높여가자 멀리 휘트니의 위용이 조금씩 드러났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탄성을 지르고, 또 한편으로는 압도당하였다.


7시간 동안의 산행 끝에 베이스 캠프인 어퍼 보이스카웃 호수(Upper Boycott Lake)에 도착하였다. 휘트니의 발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어퍼 보이스카웃 호수는 해발 3,500m 지점으로 휘트니를 등반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 캠프를 설치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동안 고소에 적응한 후 다음날 새벽 휘트니 정상 등반에 나설 계획이었다. 일부 대원이 가벼운 고소 증상을 보였으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루만에 정상 등정을 마치고 다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으므로 우리는 해가 저물자 곧 잠을 청하였다. 마침 보름달이 떠올라 주변의 첨봉들은 선명한 실루엣으로 그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새벽 3시, 우리는 부산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였다. 등반 시작점까지는 다시 3시간 정도를 더 걸어 올라가야 한다. 어퍼 보이스카웃 레이크 베이스 캠프보다 상단에 있는 아이스버그 호수(Iceberg Lake)에서도 캠프를 차릴 수 있지만 호수는 아직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고 눈이 쌓여있어서 물을 구하기 힘들다. 이른 새벽 길을 나섰지만 고소 때문에 걸음은 더디었고, 휘트니 하단에 도착할 무렵에는 완전히 해가 떠올랐다.

휘트니의 위용.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휘트니이다.

바위 절벽에도 길이 있다. 

멀리 올려다본 휘트니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거대한 하나의 바위 덩어리처럼 느껴졌지만 좀더 다가가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준비하고 각오한 이들에게만 조용히 열어주는 바윗길이다. 네 명이 한 팀을 이룬 우리는 눈이 쌓인 설사면으로 접근하여 본격적인 암벽등반 루트에 도착하였다. 역시나 한국의 흔한 바윗길처럼 고정볼트와 같은 인공 확보물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가져간 장비를, 스스로 설치하고 올라야 한다. 모든 것은 등반자의 책임인 것이다.


휘트니에는 여러 개의 등반 루트가 있는데 우리가 오르기로 한 루트는 이스트 버트레스(East Buttress)였다. 고난이도 등반 루트는 아니었지만 등반 길이가 450m나 되고, 고소 증상이 올 수 있는 4,000m 이상에서 순간적인 완력을 써야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곳이었다.


늘 치명적인 위험이 따르는 암벽등반은 오르는 과정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철저한 준비과정도 중요하다. 여기에는 대상지의 지형과 난이도, 날씨, 등반 예상시간 등을 포함한다. 우리는 대략 8시간 정도의 등반 시간을 예상하고 해가 지기 전 베이스 캠프로 복귀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첫번째로 4000m 고도에서 충분한 기술과 완력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 중요하게는 휘트니의 4월 날씨는 완전한 겨울이었다. 특히 오후가 되자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절벽 위에서 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는 동작이 점점 둔해졌다. 


일몰 전에 정상 등정을 마쳐야 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해가 지자 기온은 급강하하였고, 가장 마지막 등반자였던 나는 우모복을 꺼내입었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추위는 고통스러웠다.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을 거 같았고, 잠깐이나마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바위 틈이 있으면 기어들어가 자고 싶었다. 타 들어가는 듯한 목을 적시기 위해 배낭 속 물통을 꺼냈을 때 물이 얼어붙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영하 5도 이하의 기온이었을 것이다.


어둠은 앞서 오르는 선등자를 시선에서 사라지게 했고, 바람 소리는 의사 소통을 방해하였다. 다만 서로를 연결하고 있는 등반 로프의 움직임으로 선등자들의 등반 진행 상황을 짐작해야 했다. 우리를 연결한 로프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바윗길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어둠 속에서의 등반 

예상했던 등반 완료 시간이 지나고 끝내 어둠 속에서 등반을 계속해나갔다. 중간에 하산을 하거나 탈출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손도 얼어붙어 바위를 제대로 잡을 수 없었지만 끝까지 계속 올라 정상에 서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잠시 기다리는 시간에는 제자리 뛰기로 몸을 녹이기도 하였다. 저녁 8시 30분, 마침내 선두에서 등반 완료라는 무전이 들렸다. 밤 9시가 되어서야 모든 대원이 정상에 설 수 있었다.

휘트니 정상에서 광활한 하이 시에라의 장관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희망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별빛으로 대신해야 했다. 극도로 지친 우리는 따뜻한 음식과 휴식이 필요했지만 정상은 제대로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휘트니 정상의 무인대피소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더욱 나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기대했던 정상에서의 풍광과 기쁨 따위는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고 그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대피소가 눈물나도록 고마울 뿐이었다. 


22시간만의 귀환

베이스 캠프를 출발한지 17시간만에 정상에 선 우리는 준비해간 행동식으로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 갈라진 목을 적셨다. 고통스러웠던 등반 과정은 순식간에 잊혀지고 우리는 짧은 휴식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이제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한다. 밤 10시, 우리는 하산을 시작하였다. 달빛이 밝았지만 익숙치 않은 지형이라 하산도 더디게 진행되었다.


등반자들은 대부분 마운티니어 루트를 통해서 휘트니 정상에서 하산한다. 우리도 마운티니어 루트를 통해 하산하기로 하였다. 휘트니 정상에서 마운티니어 루트로 진입하는 초입은 급경사 지형으로 로프를 이용하여 하강을 해야 했다. 오랜 등반 경험을 가진 산악인 유학재 대장은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대원들의 안전한 하강을 도왔다. 전원 무사히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유학재 대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캠프로 돌아오는 길 검게 드리운 산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 있었고, 달빛은 푸르러 처연했으며 흰눈은 그저 묵묵했다. 나는 앞서 가고 있는 대원의 헤드랜턴 불빛을 따라 한발한발 걸어갔다. 길고 넓은 설원에서 작은 별처럼 깜빡이는 랜턴 불빛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가파른 구간 하강을 마친 후 로프를 정리하고 있다.

달빛 아래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는 길은 길고도 길었다. 새벽 4시에 베이스 캠프를 출발하여 다시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캠프로 복귀하였다. 캠프에 남아있던 대원들은 크게 걱정하고 있었고, 전원 무사히 돌아오자 기뻐했다.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텐트 바닥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눈을 감자 휘트니에 휘몰아치던 바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텐트 위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였고 나는 죽음처럼 깊은 잠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이제 추락한다고 해도 나는 안전한 텐트 안이었다.

마운티니어 루트 상단은 급경사라서 등반 장비가 필요하다. 사진은 2019년 2차 휘트니 원정 당시 등반 사진이다.
[휘트니산 등반 정보]
휘트니산의 이스트 버트레스(East Buttress) 루트는 등반 시작점에서부터 최고 난이도 5.8 수준의 테크니컬 등반이 필요한 곳으로 전체 구간의 등반 수직 고도는 약 450m이지만 루트가 일직선으로 뻗은 게 아니라서 실제 등반 길이는 그보다 훨씬 길다. 전체 11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정 확보물이 거의 없으므로 확보를 위한 장비와 슬링 등의 장비 일체를 준비해가야 한다. 정상 등정 후 하산은 이스트 버트레스 우측 꿀르와르 인 마운티니어 루트(Mountaineers Route)를 이용한다. 마운티니어 루트 역시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하산시에도 안전벨트, 로프 등의 장비가 필요하다. 암벽등반 최적기는 대부분의 눈이 녹는 6월부터 겨울이 찾아오기 전인 9월까지이다. 적설기나 동계 시즌에는 피켈과 빙벽화, 크램폰 등의 장비가 추가로 필요하다. 



[1] High Sierra. 캘리포니아 남북으로 약 640km 이어진 산맥을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라고 부르며, 휘트니 산을 포함한 3000미터 이상 고지대를 하이 시에라라고 부른다.

[2] 雪溪面. 깊은 산 골짜기에 겨울이 다 가도록 눈이 녹지 않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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