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2시. 721번 버스를 타고, 연남동에 도착했다. 비가 온 후,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선선한 여름이었다.
커피그래피티로 들어갔다. 가게 오픈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이종훈 대표님과 그래피티 식구들이 보였다.
오늘 오마카세에서는 올해 갓 수확된 게이샤를 선보여주신다고 했다. 게이샤 커피가 한국에 소개된지는 오래되었지만, "제철"이라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했다. 제철 커피는 무엇이 다를까?
커피의 신선함을 이야기할 때 보통은, 로스팅 시점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피티에서는 "농장에서 수확한 시점"을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농장에서 갓 수확한 커피를 선별하여, 비행기를 태워온 커피. "초신선"이라는 단어는 이런 경우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지.
시간이 되자, 함께 오마카세를 즐기기로 하신 분들이 오셨다. 우리는 그래피티 안쪽에 마련된 널찍한 테이블에 앉았다. 대표님께서 007 가방과 같은 철제 가방을 꺼내셨다. '무엇이지?' 싶어 보았더니 커다란 커피콩 모형이 들어있었다. 커피 체리가 그대로 붙은 붉은 커피콩. 실제보다도 훨씬 큰 모형이었다.
오마카세를 위해 준비된 자리. 붉은 것이 커피 모형
붉은 체리가 붙은 이 자체로 건조하면, "내추럴 프로세스". 체리를 제거하고, 그 안에 보이는 땅콩 껍질도 제거하고 씻어 말리면 "워시드 프로세스"라고. 커피의 건조 과정을 모형으로 보면서, 설명을 들으니 한층 실감이 더 났다.
건조를 하고 난 후, 그 안에 또 다른 하나의 얇은 껍질 파치먼트가 보였다. 구매자가 "살게요"라고 주문을 넣으면, 농장에서는 이 파치먼트를 까서 생두를 보내온다고 하셨다.
대표님께서는 간단히 설명을 마치신 뒤, 모형을 가방에 넣으며 이야기하셨다. "커피의 신선함이 왜 중요하냐고 물으신다면, 커피도 결국 과일이기 때문이에요."
아, 커피가 콩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과일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었다. 대표님 이야기를 들으며, 커피가 품고 있는 과일의 다채로운 향과 맛을 생각해보았다.
2년 3년 묵혔다 먹는 과일은 없는 것처럼, 커피 또한 신선함이 중요하지 않을런지. 그래피티에서는 왜 "초신선"을 고집하는지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배로 온 과일보다는 갓 수확하여 비행기를 타고 온 과일이. 당연히 훨씬 맛있지 않겠는가?
커피 체리를 정리하고, 브루잉 도구를 가져오신 대표님께서는 파나마에서 갓 수확되어 보내진 에스메랄다 게이샤 원두를 분쇄해 오셨다. 이건 테스트용 샘플이고, 본품은 아직 비행기를 타고 오고 있다고.
자리 앞에 놓인 가족사진이 보였다. 에스메랄다 농장주의 가족사진. 오래전은행에 다녔던, 나는 에스메랄다 농장주의 이야기가 늘 흥미진진하게 여겨졌었다. Bank Of America 은행을 은퇴한 후, 커피 농장주로서의 삶을 살아간 리처드 피터슨의 이야기.심지어 은퇴 후 게이샤라는 품종까지 발견한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만하면 꽤 흥미진진한 인생이 아닐까?
에스메랄다 농장, 리처드피터슨의 사진
사진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대표님께서 리처드 피터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리처드 피터슨은 은퇴 후, 파나마로 건너가서 다양한 사업과 커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우유 사업도 크게 한다고. 그렇게 여러 사업도 일구고, 커피농사도 지으며 지내던 중, 2002년 파나마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았다고 했다. 농작물에 피해가 크자, 인근에 사는 파나마 농장주 세명이 모여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고. 그들은 질병에 강하게 개량된 품종을 각각 나눠 심었다. 그중 한 농장인 에스메랄다만 성공했고, 커피를 맛본 리처드 피터슨은 기존에 마시던 커피와 너무 다른 맛이어서, 검증 겸 품평회에 출품을 했다고. 이것이 엄청 크나큰 이슈가 되었더랬지.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게이샤가 나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염병을 피한 종자를 개발하기 위해 고민하기 위해 나왔다니. 새삼 게이샤가 다르게 보였다.
리처드 피터슨은 은퇴 후에도, 자신이 새로 개척한 사업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은 커피 농사를 짓지도,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끝에 나온 것이 게이샤 품종이라고 생각하니. 무게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대표님께서는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사실 많은 분들이 왜 게이샤가 비싼지 궁금해하는데, 게이샤가 비싼 이유는 나무 하나가 하나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에요. 동일 땅 면적 안에 심을 수 있는 나무의 그루수는 줄어들었는데. 심지어 나무당 열리는 체리의 개수도 적거든요. 면적당 생산량이 적으니 당연히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농장주의 입장에서는 다른 품종을 심어서 수확하는 것과, 게이샤를 심어서 수확하는 수입이 사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수 도 있다더라고요."
에스메랄다 농장의 이야기에 푹 빠져 듣고 있는 동안, 분쇄한 원두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래피티에서 취급하는 "초신선 원두"는 추출이 쉽지 않기 때문에, (1)높은 온도에 (2)미세하게 갈아서 마시기를 권장한다고 하셨다. 아. 추출방법의 차이 때문이었구나. 그래피티 원두를 집에서 마시면, 매장과 동일한 맛이 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했는데. 조금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대표님께서는 물을 팔팔 끓여, 100도씨로 온도를 맞춘 후, 미세하게 간 원두에 총 300g의 물을 부으셨다. 90g쯤 부으셨을 때, 한번 스푼으로 휘휘 저어주셨다. 이산화탄소가 많아 스푼으로 두터운 가스층을 깨 준다고. 한번 젓고 나니, 신기하게도 그다음부터는 원두가 잘 추출되었다. 고르게 커피를 추출한 후에 마지막 물까지 남김없이 내리고. 추출된 커피를 스푼으로 한번 더 저어주셨다. 처음 내려온 커피의 농도와 뒤에 내려온 커피의 농도가 달라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잘 저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평소와는 다른 추출방법으로 내린 커피를 나눠주셨다.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게이샤 커피의 향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향긋한데. 살짝 새콤하기도 하고. 신맛과 새콤함이 다른데, 이건 과일에서 나는 기분 좋은 새콤함이었다. 산미는 강하지 않고, "나 신선해"를 외치고 있었다. 커피가 푸릇푸릇하다고 해야 할까. 물 한 모금을 마시니 입안에 있던 향이 씻겨지며, 달콤함이 퍼져나갔다.
좋은 커피를 공수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선함과 향미가 온전히 살아있는 제철에 그 커피를 마시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게이샤 커피를 취급하는 곳이 많아져서. 게이샤 커피는 많이 마실 수 있지만, 이렇게 신선한 게이샤 커피는 그래피티에서 밖에는 못 먹겠다는 생각과 함께.
두 번째 커피는 핀카 데보라 농장의 게이샤로 만든 아이리쉬 커피였다. 핀카 데보라는 유명한 바리스타들이 핀카 데보라 농장 원두를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농장이라고. 그런데 아까 전부터 그 옆에 있던 위스키 보틀에 눈길이 갔다. '저건 뭐지?' 홀낏 홀낏 쳐다보고 있으니, 대표님께서 웃으면서 이야기하셨다.
아이리쉬 커피를 만들기 위한 로즈뱅크 위스키와 설탕, 크림
"이 로즈뱅크 위스키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잘 퍼지는 위스키로, 게이샤 커피와 잘 어울려요. 증류소가 대기업에 인수합병이 되면서, 그곳에서 일하시던 직원들이 해당 제조 기구들을 모두 팔아버렸어요. '이후에 나오는 위스키는 더 이상 로즈뱅크 위스키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말이죠. 지금 보고 계신 이 위스키는 그 마지막 병이에요.
순간 '아, 저걸 마셔도 되는 것일까. 술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엄청 귀한 것 같은데.' 대표님께서는 싱긋 웃으시더니 "오늘은 특별한 체험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하고 추출한 게이샤 커피에, 쿨하게 위스키를 넣고 잘 저어주셨다.
컵 네 잔에 커피를 따르고, 순차적으로 크림을 부었다. 이 아이리쉬 커피는 내 평생 마시는 아이리쉬 커피 중, 가장 귀한 커피일 것이리라.
로즈뱅크 위스키와, 게이샤 아이리쉬 커피
귀한 게이샤 위에. 이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위스키라니. 귀한 것 위에 귀한 것을 한 모금 마시자. 크림과 커피 위스키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향긋함이 배가 되어, 부드럽고 달콤하게 목을 축였다. 두 번에 나눠 마시라고 하셨는데. 너무 아까워서 네 번에 나눠 마셨다.
오마카세에 동행하신 다른 분의 말씀에 따르면, 꽤 여러 곳에서 아이리쉬 커피를 찾아 마셨었는데. 그동안 마셨던 아이리쉬 커피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조화롭고 부드럽게 어울리는 아이리쉬 커피는 처음 마셔보셨다고 했다.
시연을 모두 마치신 대표님께서 이야기를 하셨다.
"이번 해는 게이샤 작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엘리뇨 현상 때문에요." 대표님께서 쓰셨던 책에서도 본 이야기였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더 이상 좋은 커피를 마시기가 어렵다고.
"좋은 커피의 해발고도가 자꾸 올라가고 있어요. 예전에는 1800m만 되어도 느껴졌던 커피들이, 지구 온난화 때문에, 이제는 2000m는 넘어야 그 향미가 느껴지더라고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아마 여러분들께서 이 커피를 즐기시기가 지금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로즈뱅크 위스키를 게이샤와 함께 내어드린 이유는. 커피도 위스키도. 모두 다 제 때가 있다는 것으로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게이샤 커피는 자연이 변하며, 언제 이 맛과 풍미가 변할지 모르고. 위스키는 사람에 의해서 사라졌지요. 두 가지의 공통점은 모두 즐길 수 있는 시기가 유한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도, 좋고 신선한 제철 커피가 있을 때. 그것을 맛있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대표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길목,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영원하겠지 여기며, 언제까지나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다 끝이 있는 것이었구나.
사람의 목숨도 끝이 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겠지.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늘 마신 커피는 끝이 있기에, 유한하기에. 오히려 더 맛있고 귀하게느껴졌다. 지금만 마실 수 있는 커피 한잔의 가치. 과연, 이 가치는 어떻게 매겨야 할까? 가장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것이 시간인데. 그래피티는 "그 시간"을 팔고 있었다.
그래피티의 핀카 데보라 커피를 사 가면서, 이번 주에는 가족들과 이 커피를 맛있게 나눠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있기에, 오랜 여운이 남는. 커피 오마카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