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복동>을 보고
평소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질문을 끌고 간다. 어제도 나는 김복동이 되어 나 자신에게 던졌다.
내가 김복동이라면 27년 간 일본 전범 세력과 싸울 수 있을까?
내가 김복동이라면 27년 간 일본 대사관의 침묵을 견딜 수 있을까?
내가 김복동이라면 27년 간 매주 수요일에 시위에 참여할 수 있을까?
내가 김복동이라면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찬 바람과 눈보라를 뚫고 수요 시위에 참여할 수 있을까?
내가 김복동이라면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알리러 다닐 수 있을까?
내가 김복동이라면 성범죄 피해자가 가해자처럼 숨어 살아야 했던 시기에 당당하게 난 일본군 성노예였다고 증언할 수 있을까?
내가 김복동이라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남들은 영화 후반에 많이 훌쩍였으나 난 초반부터 울었다. 영화는 초반에 그녀도 웃고 울고 친한 친구와 농담도 하는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김복동이라는 여자의 일생을 훔쳐본 순간 '피해자 다움' 프레임에 벗어났다.
할머니에게 미안했다. 그녀를 위안부 피해자로만 기억했지 '인간 김복동'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미디어는 그녀를 위안부 피해자로 소비했고 난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누구도 평생 국가 권력의 피해자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다. 살다 보니 내 딸이, 내 아들이, 나 자신이 권력의 폭압에 인생이 뒤틀려진 거다.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도 평범한 이웃이다.
영화는 평화 인권 운동가 김복동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김복동 할머니가 주로 나오는 게 맞다. 영화 중반쯤 나는 걱정됐다. 김복동이 죽어도 살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전범 세력과 싸우고 있는데 한 사람만 싸우고 있다고 비칠까 하는 노파심에서였다.
영화는 나 같은 사람의 속내를 간파한 듯 김복동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지만 위안부 할머니 피해자 다수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김복동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게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냉정함을 유지하는 까닭이다. 누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지, 어떻게 위안부 문제가 전 세계로 알려졌는지 그리고 피해자들은 어떤 활동을 했는지 따뜻하면서도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있다.
내가 산 시간보다 훨씬 오래 사죄하고 전쟁범죄 배상하라고 외친 그녀였다. 나는 감히 영면한 그녀에게 평생 청춘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그녀는 죽는 순간에도 청춘이었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나이가 20대여도 희망과 열정이 없다면 노인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요, 나이가 90이어도 희망과 열정을 가슴속에 품고 산다면 그 사람은 푸른 봄의 삶이다.
나는 김복동에게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먹고 육신이 실시간으로 썩어감에도 정신은 꼿꼿이 살아있는 조선시대 선비 기개를 보았다. 전쟁 반대 평화 인권 운동가 김복동의 인생에 경의를 표한다.
죽어있지만 살아있다. 여전히 김복동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