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고1 여름 방학.
중학교 때부터 다니던 학원은 있었지만 도무지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가 다닌다는 학원의 전단지를 받아, 처음으로 대형 단과 학원을 다녀보기로 했다.
가로로 엄청나게 길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전단지엔 과목명, 강사 이름, 알파벳으로 된 수강 기호, 수업 시간표 등이 적혀 있었다. 어차피 누가 잘 가르치는지 알 수도 없고 해서 영어, 수학 한 과목씩 적당히 골라 수강증을 끊었다. 과목당 수강료가 3만 원이 채 되지 않았으니 그 시절에도 싼 가격이었다.
아침 수업이라 일찍 집을 나섰다. 창경궁 버스 정류장에서 2번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 충정로에서 내렸다. 충정로 우체국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학원. 수강증을 제시하고 건물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있긴 했는데 학생들은 좁은 계단을 이용해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 10시 수업이었는데 아마 9시쯤 도착했을 것이다.
4층, 복도에 자판기가 있길래 100원짜리 밀크커피(카페오레 같은 말은 없었다)를 하나 뽑아 들고 강의실을 찾아가 문을 열었다. 나보다 먼저 온 여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문 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잠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리를 잡고 《수학의 정석》을 꺼내 읽다 말다 했다.
아마 집합과 명제, 방정식과 부등식, 뭐 이렇게 나가는 수업이었을 텐데 수업 내용을 제대로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여름내, ‘나보다 먼저 온 여학생’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중에 이어 남고에 재학 중이던 수영 못하는 사춘기 남학생은, 인생에 갑자기 닥쳐온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방학 전에 학교에서 2박 3일 과학 캠프라는 걸 신청했는데 대천이던가 아무튼 서해 어디로 간다고 했다. 어머니에겐 담임이 과학이라 의무라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신청할 땐 난생처음 바다에 놀러 간다고 좋아했는데, 막상 떠날 때쯤엔 2박 3일 학원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이어폰만 꽂고 있었다.
물이 무섭기도 했지만 과학은 물보다 더 무서워한 터라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게 고역이었다. 그 뒤로 긴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다에 뛰어드는 친구들과 섞이지 않고 파도에 발이나 적시며 혼자 걸었다. 음악을 배경으로 그 여학생을 생각하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일은 나쁘지 않았다. 고1이었지만, 중2병이었다.
저녁 식사 후 캠프파이어. 장작이 꽤 높이 쌓였다. 선생님이 약간의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셨다. 불길은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우리의 눈도 불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간 불꽃이 닿을 듯한 자리에 별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가뜩이나 간지러운 이야기에 유행어 같은 말을 붙이는 게 우습지만, 어쩔 수 없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