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회고전 후기
바쁜 나날이지만 잠깐의 여유를 틈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간 것은 김창열 작가님의 전시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아 정말 아무런 수식 없어도 그저 빛나는 이름 세 글자. 김창열.
아무런 수식어 없이 이름만으로 납득과 설명이 되는 예술가. 전시에 별다른 부제가 붙지 않는 것 또한 김창열 작가님의 예술 세계를 완성시켜 주는 것 같았다.
물방울의 의미를 알고 나니,
내 눈가에 고인 눈물 한 방울,
또르르!
김창열 작가는 왜 그렇게 물방울을 그렸던 것일까? 무지했던 나는 잘 몰랐었다. 그러니까 작품의 표피만 알았던 셈이고, 이번 전시회에서 비로소 작품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
-김창열-
아, 전장의 상흔. 의미를 알고 보니 작품에 맺힌 물방울 한 알, 한 알이 다르게 다가왔다.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고 그린 물방울. 건조한 내 눈가에도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역시 예술가는 괴로운 상처를 이렇게 근원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구나.
작가가 물방울을 그리게 된 계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작가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15세에 월남하며 고향을 떠났고, 해방과 분단,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며 성장했기에 삶과 죽음은 그에게 생생한 화두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제사>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들을 보면서 더 그 부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김창열은 이쾌대 작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김창열 작가는 평생 그림만 그린 줄 알았는데 경찰전문학교에 입교하여 제주도에서 1년 6개월간 근무한 이력도 있었다.
물방울 시리즈 말고도 새로운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
1950년대 후반 그는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을 주도하며 서구에서 유입된 앵포르멜 미술을 한국의 상황에 새롭게 접목하려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은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예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감정적인 표현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1965년 김 화백은 김환기 작가의 권유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으면서 뉴욕으로 건너갔는데 이곳에서의 삶도 순탄치는 않았다.
한국에서 꾸준히 그려온 앵포르멜 회화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생계를 위해 넥타이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회화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기하학적 형태의 작품이 등장하게 되는 것. 그리고 공장에서 익힌 스프레이와 스텐실 기법이 이 시기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하니 살면서 하는 모든 경험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1969년, 그는 뉴욕에서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1971년 마침내 물방울 작품이 탄생한다. 캔버스를 재사용하기 위해 뿌려둔 물이 맺힌 것을 본 순간, 김창열은 그 안에서 완성된 형태의 충만함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유레카. 그러나 물방울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그간 걸어온 과정을 되짚어 보건대, 물방울은 무수한 그의 땀방울의 결정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작품을 가까이에서 볼수록 그의 눈물과 땀이 뒤섞인 흔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작가는 파리 외곽 팔레조의 마구간 작업실에서 열악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물방울 작업에 몰두했고, 1973년 고가구를 취급하던 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계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근 30평이나 되는 마구간에서
작은 난로 하나를 때는 때라서
난방은 있으나 마나 한 거지.
나는 중처럼, 도인처럼 수도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쪼그리고 앉아있곤 했어.
그때 심정은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지.
바로 그 자리에서 물방울이 탄생한 거야.
바로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고통스러울 때
물방울이 튀어나온 거야.
-김창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숭고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역설을. 물방울은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서 생긴 상흔들이 알알이 성취로 맺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서예학원을 다니며 만난 어르신들은 내게 빨리 서예를 시작한 것이 축복이라고들 하신다. 나이가 들면 손이 떨려 마음처럼 글을 쓸 수가 없다고. 그래서 김창열 화백의 다큐멘터리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최대한 오래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신체적 나이와 체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서라도 계속 오래 하고 싶은 마음을 상기시켜 주어서 감사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본격적으로 화면에 문자를 도입한다. 그는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는 과정에서 글자와 이미지가 맺는 긴밀한 관계에 주목했고, 이후 천자문을 도입한 '회귀' 연작으로 이어진다.
손 글씨와 서예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문자예술이라는 점. 유독 문자에 관심 많은 내게는 회귀 섹션에서 보았던 시리즈들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김 작가는 다섯 살 무렵 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고 하는데,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듯 화면을 천자문으로 채워나갔다. 결국 그는 가장 순수한 그때의 모습을 돌아가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의 상흔을 그리고, 위로하며, 계속 나아가며 결국은 치유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물방울을 집착에 가까운
정신적 강박으로 그려왔다.
내 모든 꿈, 고통, 불안의 소멸,
어떻게든 이를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며.
- 김창열 -
결국 물방울은 김창열 작가의 삶, 그 모든 스토리텔링의 완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의 땀과 열정, 눈물, 그의 삶이 모조리 담겨있다.
역시 대가의 생각은 남다르구나. 그의 삶의 모든 시련과 고통이 작품에 알알이 맺히게 하고, 또 그것을 치유하는 힘.
이전에도 물방울 작품은 봤지만, 그의 생애는 자세히 몰랐기에 이번 전시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의 삶과 물방울에 담긴 의미를 알고 보니 내 눈가에도 눈물이 알알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