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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Mar 06. 2024

05 사랑은 찌질해도 괜찮아



 "나 오빠 집 앞인데 잠시만 나와주면 안 될까?"

 "그냥 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


 왜 사랑은 늘 극에 달해야 말도 안 되게 간절해질까. 나의 찌질함이 마치 더 대단한 사랑이라 착각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늦가을 바람은 차가웠던 그날. 바로 전날 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달라던 그의 진심을 무시한 채 집으로 들어가 숨죽여 울었다.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 무렵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미쳤던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그를 보낼 수 있었을까. 우리가 함께한 사랑이 얼마나 특별했는데. 택시를 잡아 무작정 그의 집 앞으로 갔다. 차에서 내리자 옅은 입김이 나왔지만 차라리 더 추워지길 바랐다. 볼품없고 찌질하게 보여야 내 마음의 간절함이 닿을 것 만 같아서. 그는 전화를 힘겹게 받았지만 나올 수 없다는 단호한 말만 전했다. 하기사 어제 그렇게 당했는데 순순히 나오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오빠...."

 "아버지랑 한 잔 하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그럼."


 세상에나. 기회가 생겼다. 최대한 불쌍하게 낡은 벤치에 앉아 그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저 멀리서 그의 발소리로 추측되는 인기척이 들렸다. 그였다. 나를 보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가방에서 주섬 주섬 경량패딩을 꺼내어 무릎에 덮어줬다. 모질게 말은 해도 덜덜 떨고 있는 내가 가여웠나보다. 성공이다. 그는 조용히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알코올향과 함께 그는 입을 뗐다.


 "왜 왔어?"

 "내가 미안해.."


 그의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커플 케이스는 하루 만에 사라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못되게 굴었던건 새까맣게 잊고서 그의 사소한 변화들에 촉각이 곤두세워졌다. 그가 뭐라 말을 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에서 나를 거둬낸 것 같아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숱한 전쟁을 더 겪고나서 진짜 이별을 했었다.


 내 사랑도 군데군데 찌질하고 어이없고 멍청한 찰나들로 가득했다. 가끔, 시간이 흘러 엄마에게 에피소드 제공의 개념으로 내 찌질했던 과거사를 늘여놓으면 대수롭지 않게 엄마는 말해줬다.

 

 "인생은 그렇게 찌질할 때 크더라."


 아직도 그날의 벤치를 떠올리면 우습게도 가슴이 시리다. 사랑을 잘해보고 싶은데 사랑이 너무나 어려웠던 나의 옛날. 사실 옛날이라 표현하기도 무색하게 불과 몇 년 전이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보다 조금은 더 성장한 내가 되어있는 듯하다. 갑자기 두서없이 내 찌질한 과거사를 떠올린 이유는 참 단순한 사건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한 야근덕에 몸이 스물 갈래로 갈라지듯 힘들었던 날, 집에 도착하니 현관 앞에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택배박스가 놓여있었다. 최근 구매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이 정도 사이즈의 택배를 시켰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근래에 심해진 건망증이 도졌나 싶어 한참을 서서 생각하다 운송장을 보니 '셈xx 씨 성함 미기재'라 쓰여있었다. 5년동안 같은 곳에살다보니 택배기사님들도 내 이름을 단박에 알고 계실 거라 추측했지만 흔치 않은 성만 보고 나라고 확신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몇주 전 같은 층에 같은 성의 이웃이 생긴 것을 의도치 않게 알게 되었던 터라 조용히 그녀의 현관 앞으로 택배를 옮기다 또 한 번 의도치 않게 그녀의 통화소리를 듣게되었다.


 "오빠. 내가 잘못했어. 지금 갈게. 만나주라. 응? 나 진짜 오빠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초인종을 누르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찰나 마침 하나 더 와있는 택배 상자의 그녀 이름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 앞에 두었다. 어쩌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오늘날을 떠올리면 온몸에 털이 솟든 창피함이 몰려올지 몰라도 매달려도 보고, 찌질하게 붙잡아도 보고, 다 해봤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러한 꼰대적 발상은 그녀가 나보다 서너 살 어리다는 것을 친구와의 대화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서자 문득 그날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애. 참 거기서 거긴가 보네.


 그리고 며칠 뒤, 그녀의 남자친구로 추정되는 남자가 한가득 장을 본 장바구니를 들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성공했나 보다. 그를 붙잡기 작전에 말이다. 부디 그녀는 먼 훗날 그날을 함께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오랜 연인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나는 그날도 출근을 했다. (하하)


 견고하고 탄탄한 연애를 하는 지인들을 보며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난 왜 연애만 하면 싸울 땐 한 없이 찌질해지고 못되지는 것일까 하며 말이다. 그런데 연애는 아마도 현관 속에서 이뤄지지 않을까. 진짜 연애는 원초적으로 찌질하고 못되지만 이면에는 한 없이 희생하고 끝 없이 사랑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양가의 연속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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