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게 집착이라 말했다. 단 한 번도 연락 좀 자주 하라고 닦달하한적도, 담배를 끊으라고 잔소리한 적도, 알고 지내는 이성 친구가 몇 명이고 누군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집착은 이토록 선명한 장면들로 인지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녀는 내게 집착이라 말했다. 그를 좋게 기억하기에 여전히 내내 떠오르는 나의 마음을 그녀는 그 또한 결국 놓지 못하는 집착이라 말했다. '집착'이라는 의미의 폭이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더 이상 품을 필요 없는 감정을 품고 관계의 서랍장을 닫지 못함이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이라 그녀는 말해주었다. 당시에 그녀의 말이 아팠지만 꿀껌 삼켜냈다. 인지하지 못한 생각과의 충돌은 아프지만 결국 확장시켜준다. 다양한 의미의 폭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초콜릿이라 여겨 소중히 한 입 먹고 또 이따금씩 생각나면 꺼내어 한 입 먹다 퇴근길 들린 집 앞 마트에서 매대를 가득 채운 그 초콜릿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었구나 느껴질 때의 느낌 말이다.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아껴왔고 지켜왔던 것이 그저 수많은 초콜릿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기로에서 슬픔이 밀려왔다. 어린 왕자가 일곱 번째 행성에서 수천 송이 장미를 보았을 때 그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이내 울고 말았지만 나의 슬픔은 다른 의미의 슬픔이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한송이의 장미가 내 사랑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일종의 억울함이 내재된 슬픔이었다. 이미 떠난 지 훌쩍 지난 공터에서 혼자 돌아오지 않을 무언의 그림자를 기다린듯한 허함마저 이어 밀려왔다. 내가 더해준 의미들이 결국 나를 아프게 했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고통의 근원은 특별하다 칭한 내 마음에서 비롯되었기에.
'특별한 사람이었어.', '우리에겐 너무나도 행복한 추억 투성이야.' 이와 비슷한 무수한 문장은 그 어느 구석에도 부정의 기운을 품지 않는다. 그런데 관계의 정의가, 그 의미가 너무 오래 한 시점에 머물러버린다면 결국 아끼고 아끼던 초콜릿은 이내 품속에서 녹고 말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을 만들 것이다. 특별했던 건 그때의 그 사람과 관계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관계적 의미를 상기시킨다면 결국 더 큰 상처를 받고서야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상에 그다지 특별한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이 마음가짐이 견고해지면 오히려 건강한 관계 형성을 경험하게 된다. 함께인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고 행복이 찾아왔을 때 기꺼이 맞이 할 수 있다. 관계를 종속시키지 않고 방목하며 그 찰나의 소중함을 잘 알기 때문에말이다.
누군가는 냉소적인 내가 되었다고, 밝음을 거두었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더 건강한 내가 되기 위해 변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삶 속 구석구석 피어나는 관계들이 여전히 내게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나 관계들은 더 이상 특별하지도 유일하지도 않다. 길을 지나다 마주한 꽃이 아름답다 하여 꺾어오지 않듯 그 시절 예쁘게 핀 꽃은 그 시절의 꽃으로 남길 줄 아는 내가 되고 싶었다. 그 시작점은 간단했다.
삶의 모든 인연들을 계절처럼 바라보고 대하기. 떠나고 찾아오고 사라지고 새로이 피어나고.
소중한 순간, 관계들은 애석하게도 내 의지나 의미와 상관없이 흩어지고 모아진다. 그 찰나를 감사히 여긴다면,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 남을 것은 남고 사라질 것은 끝끝내 사라지고 만다. 나를 떠나간 시절들은 결코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떠나간 것은 아니기에. 나는 이 간단하고도 복잡한 사실을 뜨겁게 사랑하고 시리게 아파보고 지독하게 외로워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관계는 소중하다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봐주는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