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왔다. 결국, 마침내, 이윽고 한 해를 또 보낼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코끝이 시리고 입김이 쉽게 피어오르는 서른 세번째 12월.
내게 삼십 대는 어느 정도 갖춰진, 어느 정도 견고한, 어느 정도 윤곽을 보여주는 그러한 '어느 정도' 의미가 더해진 나이였다.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막연한 기대감보다 현실을 마주하는 시선이 보다 이성적이고 냉혹할 수밖에 없기에, 닿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닿았을지도 모른다며 나를 위로하기 바빴다. 그땐 그랬다. 더 행복한 날은 미래에 있다고 그렇게 가보지도 못한 시공간에 행복을 미루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러나 더 이상 사십 대, 오십 대에 무언의 행복을 투척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안정감이 결국 닿지 않은 먼 미래의 내 삶을 만들 테니. 설령 그때 가서 예기치 못한 슬픔이 찾아와도 어쩌겠는가 하고 받아들이는 게 된다. 자포자기가 아니다. 내 마음과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영역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불필요한 욕심을 거둔 초연함일 뿐이다.
나를 왜 사랑하는지 나의 어떤 부분을 유독 애정하는지 구태여 궁금하지 않는다. 사랑이 서툰 시절,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었다. 날 왜 사랑해? 그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너니까. 그 이유가 못마땅했는지 다시금 그를 괴롭히며 물었다. 그게 무슨 대답이야. 나니까라니!
나는 이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니 말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그 눈길을 잘 안다. 눈코입의 오밀조밀 위치도, 목소리의 높낮이도 다른 그들이 표현 방식은 제각기 달랐지만 같은 온도의 시선이 있다. 그 시선 하나만으로, 눈빛만으로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성과의 짜릿한 순간을 넘어서 인류애적 관점으로 확장되어 간다. 한 날은 최근 들어 부쩍 가까워진 회사 선배와의 술자리에의 일이다. 너무 평범하고 평온하여 삶의 흥미를 잃어가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대뜸 그녀에게 '너 요즘 너무 노잼인 거 같아.'라 말했고, 그녀는 그 말에 참아오던 설움이 복받쳐 퇴근 후 이불을 덮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날을 회상하며 멋쩍어했지만 비단 사소한 일이 아님은 난 알았다. 그녀는 이어 그녀의 삶에 종종 찾아오는 우울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산다 덧붙였다.
사랑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만 같아서, 그 평온함 마저 지켜내기 위해 그녀가 어떤 노력을 했을지 알 것만 같아서, 여느 날의 내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아서 나는 그녀의 빈 잔을 채워주며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선배,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하는 그 순간도, 하루를 잘 보내고 이불을 덮는 그 순간도 그 모두 다 선배가 노력한 하루였을 거야. 그 노력들이 애석한 게 당장은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더라. 근데 언젠가 선배의 삶이 더 나아졌다고 느껴지는 날, 무색무취의 평온했던 날들이 일궈준 날일테니 너무 우울해 말자."
그녀는 대답 대신 서서히 미소를 되찾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 마음을 잘 안다.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제자리걸음인 듯 미미한 삶의 변화들 앞에 자꾸만 나를 의심한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게 맞는지 반문하곤 한다. 주변은 이리저리 바쁘게만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나만 그 자리에 멈추어 선 듯한 그 느낌.
불꽃이 하늘에 쏘아지기 전 가장 고요하다. 마치 그 아름다운 번짐의 순간을 고대하 듯 숨죽인다. 인생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밤이 하늘을 채워주니 불꽃의 찬란함이 빛나 보이고, 촤르르 흘러내리는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우리는 그 시간을 기꺼이 기다린다.
여전히 삶에 대해 무한한 질문을 던지며 살지만 이따금씩 비슷한 순간을 겪는 사람을 마주하면 괜스레 사랑이 피어난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다독였던 주문으로 그들을 포용하려 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했던 그 감정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세상이, 좁게는 개인의 삶이 혼란스러운 나날이다. 내가 새로이 느껴가는 사랑의 감정을 담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활자로나마 그 사랑을 전하고 싶어 오늘도 글을 쓴다. 이 겨울이 지나면 우리에게 다시 봄이 찾아올 테니 너무 오래 추워하진 말자고. 행복도 우울도 그 외 다른 감정들은 무책임하게 먼 훗날로 보내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만끽하고 인정할 줄 아는 우리가 되자고. 잔인할 때도 많다. 인정하기 힘들 때도 더러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직시하자. 지금의 나를 잘 알아야 내일의 나를 마주할 수 있기에.
삶뿐만 아니라 나는 여전히 사랑에 대해, 낭만에 대해 고민한다. 나의 '어느정도' 걸어와 도착한 지금의 사랑은 이토록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따스히 나누고 싶은 마음들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날 그녀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한층 더 그녀를 아끼게 되었다. 그녀의 봄이 머지않아 오길 바라며 앞으로 삶 구석구석에 찾아올 무언의 우울들 앞에서도 더 단단한 우리가 되길 바라고 또 바라는 1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