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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이상형이 변경되었습니다

by 셈케이


팀장이었던 그녀의 퇴사 기점으로 우리는 언니 동생이 됐다. 10년 직장생활 중 팀장과 사적으로 친해진 경우는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한 호칭이었지만 그녀에게서 6년 후의 '나'를 느꼈달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 또한 나를 6년 전 '그녀'라고 생각했다 말해줬다. 우린 그렇게 서로에게서 서로를 발견하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비슷한 시기에 이별도 겪고, 또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사랑도 시작하며 우리의 대화주제에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봄바람이 불어오려다 다시 매서운 바람이 몰아 온 주말, 오랜만에 그녀의 동네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불현듯 '이상형'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그녀가 말한 그녀의 이상형은 나의 뇌리를 스쳐 무한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진정 그녀가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 알게 됐다.


"언니는 어떤 사람 만나고 싶어요?"

"나를 가엽게 여겨주는 사람."


키가 크고 목소리가 멋있는 남자, 탄탄한 직업에 다정함과 센스까지 겸비한 남자. 흔히 이상형을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보다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앞서 나열한 사항들을 골고루 갖춘 이성을 앞에 두고 복에 겨운지도 모른 채 공허해 한적도 있었다. 너무나도 멋진 사람임에도 말이다. 그들은 우릴 가엽게 여기지 않았다. 어감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녀와 내가 생각하는 가여움은 비단 불쌍하게 여기거나 안쓰럽게 바라보는 단편적인 관점이 아니다.




가엽다. 사전적 의미로는 [마음이 아플 만큼 안되고 처연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가엽다.'는 내가 어떤 형태의 나로 서 있어도 나를 애처롭게 봐주고 나를 끌어안아 줄 준비가 된 마음을 뜻한다.


독립한 지 5년이 지나다 보니 부모님께 밥을 먹지 않아도 먹었다 말하고 별일이 있어도 별일 없다 말했다. 회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마냥 밝은 신입도 아닌 10년 차인 내게 기대하는 것들은 다소 묵직하고 난해함 투성이다. 힘들어도 해보겠다 답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아니 당신에게만은 그저 아무런 '척' 없이 있는 날것의 나로 보이고 싶었다. 그런 날 바라보고 하염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주길 바랐다. 그 눈빛 만으로 당신에게만큼은 쓰러지듯 기대어도 되겠다 생각들 수 있도록.


돌이켜보면 연애 관계에 있어 나는 의도치 않게 '엄마', '누나'와 비슷한 역학을 주로 해왔다. 누군들 기대고 싶지 않았을까. 물론 난 사랑하는 사람을 챙겨주고 보듬어주며 느끼는 만족감을 높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자의에 의한 노력도 일부 있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정작 내가 기댈 어깨가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공허함이 밀려온 적이 적지 않았다. '자기는 잘 이겨낼 거야.', '너답게 또 해낼 거야.'라는 둥 나를 오뚝이처럼 바라봤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다 스치듯 만난 사람이 '힘들었겠어요.'라 말해주면 말도 안 되는 찰나에 마음이 콩닥대곤 했던 것이다.


'딸', '동생'같은 대우를 바란다는 말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챙기기 싫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굳센 오뚝이로 보더라도 당신 하나만큼은 내가 다음 걸음에 지쳐 쓰러질 수 있겠구나 하며 가엽게, 애처롭게, 그렇게 사랑을 담아 바라봐주길 바랄 뿐이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같이.


그녀 또한 그러한 말이었다. 강해져야만 하는 '가짜어른'의 삶 속에서 진정 나를 가엽게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이상형이 된 지금의 우리. 그래서 사랑이 더 야속하게 어려워진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가 기분이 좋아 동네 사람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자 관식은 그런 애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세상에서 쟤가 제일 웃겨."


나는 그 대사와, 그 대사를 말하던 관식의 표정에서 내가 사랑이라 일컫는 무언의 결이 묻어있다 생각했다. 천년만년 뜨거운 사랑의 감정으로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독, 그 사람이라서, 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감정은 천년만년 이어질 힘이 있다. 관식은 단순히 '웃기다.'의 의미만 말한 것 같지 않았다. 입은 '웃겨.'라 말하지만 눈은 '사랑스럽고, 귀엽고, 고맙고, 미안하고, 애처롭고, 그래.'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시선을 늘 사랑해 왔다. 내게 사랑은 딱 그러한 온도의 시선에서 증폭됐다.


다가오는 여름. 친한 동생의 결혼식에 축사를 부탁받았다. 무려 네 번째 결혼식 축사다. 엄마는 우스갯소리로 내 결혼운이 남의 결혼 축사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장난 반, 진심 반의 타박을 놓으시지만 나는 매번 진심을 다해 축사를 써내려 간다. '가여워해 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짧은 축사에 풀어놓긴 어려울 수 있지만 서로를 늘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보듬어주라 말하려 요즘 글을 쓰고 있다. 사랑에는 무엇보다 지구력이 중요하다. 내내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변동폭이 적은 부분에 사랑의 곳간을 만들고 그 속에 사랑으로 꽉꽉 채워 오래 달릴 준비를 해야 한다. 길고 짧고, 깊고 얕은 하나하나 소중한 사랑들을 겪으며 그렇게 돌고 돌아 마주한 신랑 신부로 서있거나, 인생을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살아가거나, 그렇게 서로를 오랜 시간 가여워하는 존재가 되어준다. 적어도, 내 삶에 있어 사랑은 그렇다.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나이 탓인지 내 탓인지 연애를 이어하면서도 진하게 느껴보기 힘들었던 감정. 누군가를 설렘 가득 좋아하는 감정. 나는 어이없게도 3월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 그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그는 아직 나의 마음을 눈곱만큼도 모른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이어 생각했다. 깊게 자리했던 지난 당신을 오래 사랑하고 싶단 지키지 못한 마음이 이윽고 저물어 혼자 유유자적 자유를 만끽하다 다시 봄이 오려하니 덜컥 당신이 더 흐려졌다. 사라졌다. 이제는 안다. 그를 향한 마음도 영원할 순 없을 거라고. 어쩌면 내일 샤워를 마치고 나면 마음이 무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설령 그와 연인이 된다 해도 행복과 슬픔이 공존할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때론 기쁘고 또 때론 외로울 거라고. 나는 그가 나를 뜨겁게 사랑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천천히 새싹 피듯 우리의 관계가 관계다워질 무렵, 그는 나를 가엽게 봐주는 사람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며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본다. 눈이 서서히 멈추고 있다.


봄이 오려나보다. 가여운 사랑을 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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