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하는 집으로 매달 큰 박스가 배달된다.
박스 안에는 새로 담근 된장과 고추장, 이제 막 무친 나물들, 각종 건강식품과 부모님이 텃밭에서 키운 유기농 오이, 고추, 상추 등 야채들이 한가득 들었다.
나는 매달 앵무새처럼 지난달에 보내준 것들도 아직 반이 더 남았다고 보내지 말라고 반복해 말한다.
그러면 부모님은 버리고 좋은 것, 새것 먹으라며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의 양을 한사코 보내온다. 내가 자취를 하는 기간 동안 10년이 넘게 부모님은 그렇게 해오셨다.
부모님께는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미안할수록 나는 더 무뚝뚝하게 굴었다.
폐를 끼치고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부모님이 주시려는 것이 그것이 무엇이든 입버릇처럼 괜찮다고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럴수록 부모님은 더 서운해 하셨고 어쩔 때는 화를 내기도 하셨다.
니가 그러니까, 건강하지 못하지.
너는 스스로 잘 챙기지도 않으면서, 바보같이 준다는데도 왜 받지를 않는다고 하니.
그럼 난 또 내 미안한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부모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화를 내고는 했다.
미안함 마음이 더 큰 미안할 일을 만들어 낸다.
참 바보 같은 행동이다.
그렇게 마음의 빚은 점점 쌓여갔다.
뵐 때마다 작아지는 엄마아빠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부모님 말고 누가 있을까?
언젠가는 더 이상 아무도 나에게 이런 것을 챙겨주지 않는 날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
결국 받게 될 것들인데.
웃으며 고맙다고, 부모님밖에 없다고 말하지 못했을까..종종 후회가 됐다.
다른 집 딸들처럼 애교도 피우고 더 달라고 하고, 엄마아빠가 최고라고 말하지 못했던 십 수 년의 내 자신이 이제와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늦었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지는 않았다.
긴 사춘기를 겪은, 오래토록 철없이 굴던 딸에게 아직도 부모님은 아낌 없이 주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나에겐 그 마음과 사랑을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었다.
냉큼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무언가 다른 기분이 들었다.
받는 모든 것이 빚이라고 생각하고 받지 않거나, 마지못해 받았던 때와는 달랐다. 달라진 것은 내 마음가짐과 부모님께 건네는 말 한마디 뿐인데.
물론, 마음의 빚은 여전하다. 단지 그 빚이란 것이 전에는 미안함과 송구스러움이었다면, 이제는 고마움과 감히 나는 흉내 낼 수 없는 크기의 사랑이었다.
며칠 전 논문 발표 때문에 고향에 내려갔었다. 발표 당일 아침 7시, 아빠는 텃밭에 나가 내게 쥐어 보낼 야채를 캐오시고, 친구 분의 농장에 들러 산양우유를 잔뜩 받아오셨다. 엄마가 차린 아침상에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구운 생선이 올려져 있었다.
챙겨주신 종이가방에는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먹으라고 수박, 참외, 살구, 바나나를 먹기좋게 잘라 작은 아이스팩과 함께 싸주셨고. 그 옆에는 손수 뜯어온 쑥으로 직접 만든 떡이랑, 직접 구운 계란, 일곱가지 잡곡을 넣어서 만든 주먹밥을 넣은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엄마가 건네준 무거운 종이가방을 들고 아빠 차에 올라탔다. 논문발표가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고, 끝나고 볼일을 보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겠다며 학교에 내려주면 된다고 했는데..
아빠는 2시간 반을 학교 앞에서 기다려 약속장소에 데려다주었고, 약속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다시 기차역으로 나를 데려다 주셨다.
31도가 넘는 날씨였다. 나는 여느 때처럼 속상한 마음에, 택시타면 된다니까.하고 투덜대려다 그 말을 삼켰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새삼, 나를 배웅하는 아빠는 행복해보였다. 두시간을 운전하고 세 시간 넘게 차에서 기다렸지만 아빠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 흔든다. 마음의 빚은 한 겹, 더 쌓인다. 그래도 이제는 미안하다는 생각보다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을 빚지는 것을 겁내면, 사랑할 수 도 사랑받기도 어려워진다.
어차피 부모님께 진 빚은 이번 생애는 다 갚을 수 없을테니 마음껏 마음을 빚지며 살아볼까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문득 그것이 내가 부모님께 진 마음의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