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수밖에
얄궂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은 참으로 얄궂다. 언젠가 S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뒤집는 패는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야.’ 손에 쥐어진 그것들을 보고 있자면 그저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쁜 패 다음엔 어김없이 나쁜 패가 뒤를 이었다. 나 말고도 모두가 만연한 불행 중에 소소한 행복을 부여잡고 삶을 이어가는 걸까. 그런 게 인생인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았을 내 짧은 생을 돌이켜본다. 앞으로 진행될 삶 역시 그러하다면, 무수히 쏟아지는 비극 속에 희미하게 존재할 한 줌의 열락에 기대어 살아내야 한다면, 그게 인생이라면 삶은 참으로 얄궂지 아니한가.
휴가 일정을 앞두고 약 3주 전 심한 감기에 걸렸다. 코앞까지 밀려온 코로나가 마침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랜만에 끙끙 앓았다(검사 결과 놀랍게도 음성이었다. 이렇게 아픈데 코로나가 아니라니?). 혼자 사는데 아파서 어떡하냐고 주변에서 걱정들을 했으나, 외롭다거나 서럽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병치레가 심했다. 직장 상사는 ‘몸이 먼저니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요.’라며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걱정을 했고, 나는 그의 염려를 사양치 않고 3일간 연차를 내고 푹 쉬었다. 목이 아프니 입 안이 까끌까끌해 밥이 넘어가질 않아 죽이라든가 수프와 같은 유동식 아니면 귤 같은 역하지 않은 과일들을 목구멍으로 넘겨냈다. 아프면 한약을 먹었고, 그러면 땀이 났다. 그렇게 5일을 꼬박 앓으니 잔기침 정도의 후유증만 남았고 운신할 수 있었다. 물론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오한과 통증으로 온몸을 이불로 둘둘 감고 은신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휴가 갈 때까지 코가 막혀서 이퀄라이징이 안 되면 어떡하지?’였다.
이퀄라이징(Equalizing)은 압력 평형을 말하는데, 수심이 깊어짐에 따라 높아지는 수압을 받아 수축하는 이관(유스타키오관), 부비강 등의 공간에 역으로 공기압을 넣어 압력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내외부 압력 차에 의한 통증과 부상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이퀄라이징에 어려움을 겪고 프리다이빙에 입문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퀄라이징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잘 알려진 것은 발살바와 프렌젤이다.
발살바는 스쿠버다이빙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코를 손가락으로 잡고 복근과 흉곽 근육을 수축(날숨)해 내부의 공기를 불어낸다. 불어낸 공기는 유스타키오 관으로 유입되어 내이의 압력을 외부 수심의 수압과 평형을 이루도록 한다.
코를 풀듯이 코를 잡고 흥! 하면 되는 발살바와 다르게 프렌젤은 방법이 다소 상이하다. 프렌젤은 연구개에 혀뿌리가 닿은 상태에서 침을 삼킬 때처럼 혀를 움직여서 혀뿌리에 힘을 주고 목에 차있는 공기를 비강 쪽으로 밀어 올려 압력 평형을 이루는 것이다. 입 안에 공기를 모으고, 후두개를 닫은 다음 연구개를 열어 혀, 입 및 볼살을 이용해 압력을 가하면 입 안에 있는 공기가 유스타키오관을 통하여 전달되어 압력 평형을 이루는 원리이다. 적어 놓고도 무슨 말인지 헷갈리는 이 방법이 바로 프리다이빙을 할 때 사용하는 이퀄라이징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퀄라이징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BTV라 불리는 것이다. 핸즈프리 이퀄라이제이션으로 말 그대로 손을 쓰지 않고 이퀄라이징을 하는 것이다. 손으로 코를 잡지 않고 자의적으로 유스타키오 관을 열어서 압력 평형을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수중에서 더 자유롭고, BTV가 가능한 프리다이버들은 프렌젤만 하는 이들에 비해 더 깊이 잠수가 가능하다고 한다. BTV를 훈련하기도 한다는데, 나에게 처음 프리다이빙을 가르친 강사님의 말에 의하면 BTV는 타고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정말 운이 좋다고,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걸 타고났으니 프리다이빙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길어지는 설명에 다들 예상했겠지만 내가 바로 그 타고난 BTV다. 비행기를 타거나 높은 곳을 올라가 귀가 먹먹해졌을 때 귀(정확히 말하면 이관)에 힘을 주면 코를 손으로 쥐고 흥-숨을 불어 내거나 침을 삼키지 않아도 귀가 뚫렸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랬다. 프리다이빙에 접목하여 좋게 말해서 그렇지, 나는 미약한 이관개방증을 앓고 있다. 이따금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비정상적으로 이관이 열려 나의 호흡음이 크게 들리고, 이충만감이 느껴지며, 자가강청(자신이 말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증상)의 증상이 나타난다. 그럴 때는 동굴이나 큰 통속에 갇혀서 말하는 거처럼 느껴지는데, 같이 대화하는 사람에게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런 상황은 꽤 고역이다. 최근 가수 아이유 씨가 콘서트에서 이관개방증을 앓고 있다고 말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질환이 알려진 듯했다. 세상에, 국민가수 아이유와 공통점인 게 이관개방증이라니!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쨌든 살면서 이관이 열려서 불편하면 불편했지, 막혀본 일이 극히 드문 내가 이번 감기를 앓으며 콧물, 가래로 인해 귀가 막혀버린 것이다! 피부가 헐어버릴 정도로 계속 코를 풀어대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내 프리다이빙 일정에 나는 매일 근심했다. 일하는 와중에도 혼자서 프렌젤을 연습하고, 수시로 이관을 열어봤다. 출국 약 1주일 전쯤 잔기침과 코막힘 증상이 거의 나아졌으나 물속에서 이퀄라이징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있다. 출국을 6일 남긴 월요일 저녁, 화요일로 넘어가기 직전인 자정에 가까운 시간,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가 났다. 살면서 겪은 교통사고 중에 가장 규모가 컸는데, 무려 4중 추돌이었다! 나는 네 대의 차량 중 두 번째 차량이었고, 네 번째 차량인 마지막 운전자가 정차하지 못하고 들이박으면서 무려 3대의 차를 부딪치게 한 것이다. 다리 위의 차량 정체에 경찰들이 출동했고 사설 견인차 직원들은 옆에 계속 말을 걸어댔다. 찬 가을바람이 부는 아수라장 속에서 점점 지쳐갔고, 새벽 1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나는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고를 낸 가해자의 자동차 보험에 문제가 있어 출국 전날까지, 심지어 출국하고 나서도 각종 전화에 시달린 것은 굳이 더 서술하지 않겠다.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쉼 없이 오는 전화가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는 정도로만 덧붙여본다. 게다가 사고 당시 부딪힌 다리엔 멍이 들었고 목과 허리는 점점 아팠다. 안 그래도 감기로 상해 회복되지 않은 몸이었으니 말 다 했다.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렇게 악재가 겹치나. 나는 출국 전 집 근처 명당에서 로또를 샀다. 이 정도 불운이면 못해도 로또 3등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당연하게도 당첨은 되지 않았다.
그 밖의 언급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불운들은 생략하겠다. 예를 들면 집안 사정이라든지, 수습되지 않는 벌려놓은 일들이라든지 말이다. 아차, 잊을 뻔했는데 바뀐 생리주기 덕분에 괌에 도착한 당일에 생리를 시작했다. 물놀이에 생리라니, 이 무슨 최악의 조합인지!
이 모든 불운에도 아랑곳없이 비행기는 뜬다. 출국 전날,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카톡 하던 친구에게 ‘나 진짜 짐 싼다?’라고 말을 5번 정도 하고 나서야 나는 꾸역꾸역 캐리어를 열었다. 그때 시각은 오후 9시 59분. 비행기는 오전 9시 15분 이륙이었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주차하고 첫 공항철도를 타는 게 내 목표였다. 그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는 4시쯤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했다. 부랴부랴 짐을 다 쌌을 때는 이미 출국 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누워서 자면 도무지 일어나지 못할 거 같았다. 이 상황에서 비행기까지 놓치면 지금까지 이어진 비극에 정점을 찍게 될 일이었다.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침대에 걸터앉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 출발 시간에 맞춰놓은 알람을 듣고 집을 나섰다.
어쨌거나 휴가는 시작되었다. 내키지 않든 몸이 아프든 간에 나는 떠나야 했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려 3년 만에 재개한 해외여행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