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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풋 Jan 03. 2024

나의 자연재해 역사의 서막, 동일본 대지진(2)

원전 폭발에 계획 정전이라굽쇼?

일본 열도는 물론 나의 인생을 꽤나 뒤흔든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지진 발생 당일,  최초 지진의 놀라움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밤새도록 계속되는 여진과 여차하면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수면 부족 탓일까 아니면 태어나 처음 겪는 영화 같은 재난 탓일까. 날이 밝고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든 묘한 몽롱함과 긴장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뉴스 속보만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러다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비로소 '더 이상 죽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 같다'는 나름의 근거 없는 동물적 판단으로 비록 온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화장도 지우고 샤워도 했다. 가뜩이나 일본 집은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 곳이 많아 한국에 비해 집 안이 추운데 3월 초순의 찬물 샤워는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점심이 지났을 무렵,후쿠시마 제1원전이 폭발하는 영상이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2001년 미국에서 일어났던 911 테러를 TV 생중계로 보던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지금 내가 보는 게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니! 그리고 내가 재난 영화 같은 현실의 한가운데에 있다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쪽에서 현 상황을 정면 돌파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지구의 자연스러운 활동에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나는 그저 앉아서 지구의 움직임이 잦아들길 기다리는 수밖에. 


저녁 무렵,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같은 회사의 미우라(三浦)상이었다. 우리 회사에는 외국에서 혼자 사는 나를 가엾이(?) 여기고 딸처럼 살뜰히 챙겨 주시는 파트타임으로 근무하시던 아주머니 두 분이 계셨는데, 그중 우리 집 근처에 사셨던 미우라 상이 내가 걱정되신다며 집에 직접 찾아오신 거였다. 나에게 괜찮냐고 물으시며 대뜸 '온수 안 나오지? 큰 지진이 오면 가스가 저절로 멈추는데 모를 것 같아서 와 봤어' 하시며 잠겨있는 가스미터기 안전장치를 열어 주고 가셨다. 유레카! 일본에서는 진도 5 정도에 해당하는 큰 흔들림이 발생하면 가스미터기의 안전장치가 작동해서 자동적으로 가스가 멈추는 시스템이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인 나는 그런 사실은 (당연히) 까맣게 모른 채 막연히 지진 때문에 가스가 멈췄겠거니 하고 덜덜 떨며 찬물로 샤워를 했던 것이었고. 일본인들도 살다가 처음 겪는 대지진이라 본인 가족분들 챙기기에도 정신이 없으셨을 와중에 나 같은 외국인을 챙기러 우리 집까지 와주신 미우라 상께 어찌나 감사했던지.


2024년 새해 벽두부터 일어난 일본 이시카와 현의 대지진 생중계 방송 화면.  지진 속보를 보니 2011년의 대지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진의 흔들림에서 오는 직접적인 공포보다 훨씬 크고 실질적인 난관은 따로 있었다. 규모 9.0의 후발대 지진에 버티지 못한 원전이 끝내 폭발을 일으켜 일본 열도는 전력 부족에 사태에 빠지게 된다. 이에 지자체 별로 계획정전(計画停電)이 시작되었다. 정전이 필요한 지자체(관동, 동북 지역)에서 기초 자치단체별로 시간을 나누어 정전을 실시하는 계획인데 이를테면 16시~20시까지는 사당1동 정전, 20시~24시는 사당2동이 정전되는 식이다.


정전을 실시하면 당연히 회사가 돌아갈 리 없기 마련. 미리 공지된 정전 시간에 맞춰 회사는 휴무(혹은 조기 퇴근)를 실시했지만 혼자 사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정전을 동반한 휴무 따위, 조금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살면서 한국에서도 몇 번의 정전을 겪어보긴 했지만 고작해야 몇 분, 몇십 분을 초과하지 않았는데 몇 시간을 그 춥고 컴컴한 집 안에서 나는 홀로 무엇을 해야 하나 걱정이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정전 직전에 정전을 실시하지 않는 옆 동네로 이동하여 밥을 먹고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정전 시간이 끝날 무렵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지진의 진원지인 미야기현(宮城県)에 살고 있는 친구는 한 달이 넘도록 피난소 생활을 했다. 친구에 비하면 계획정전 때마다 일시적으로 '옆 동네 피난 생활'을 하는 나는 감사한 축에 속했다. 지진으로 우리 동네 근처 마트와 편의점은 품귀 현상으로 모두가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물건이 입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컵라면과 즉석 밥, 각종 간식들을 사서 피난소에 있는 친구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업무 시간에도 최소한의 전기만을 사용하고자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업무를 보던 컴컴하고 조용한 우체국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바람을 피할 집이 있고,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고, 사용하고 싶을 때 언제든 전기를 쓸 수 있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무언가를 잃어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느낀다고 하는데 동일본대지진은 그 사실을 혹독하게 피부로 깨달을 수 있게 한 내 인생 일대의 사건이었다.  


이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동일본대지진의 여파.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내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큰 지진은 멈췄지만 지진으로 인한 새로운 불행이 나의 인생에 배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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