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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풋 Aug 10. 2023

항공편 지연이 낳은 15년 만의 우연(1)

예정에도 없던 파리에서의 1박

모든 일정이 순조로웠던 모로코 여행의 끝자락. 모로코를 떠나 파리 샤를드골(Charles de Gaulle) 공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하는 나는 H와 모로코 라바트 공항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금세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고, 환승이 복잡하다는 샤를드골 공항이라 오며 가며 조금 긴장을 했었는데 의외로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평소 여행 할 때 처음 가보는 공항을 구석구석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게이트 위치만 체크해 두었다가 탑승 시간 직전에 게이트에 도착하는 게 대부분인데, 이 날도 한국행 비행기 탑승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공항에서 밥에다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고 열심히 공항을 구경했다. 오며 가며 게이트 주변을 슬슬 둘러보았는데 이상하리만큼 대기 중인 사람들이 별로 없어 뭔지 모를 싸함을 느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항공편 안내 전광판은 보지도 않은 채 나는 공항 구경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직접 게이트에 가서 확인을 해보았더니 세상에.


갑자기 파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인천에서의 기상 악화로 내가 탑승할 비행기가 도착하지 못해 파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출발하는 일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 마이갓.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 보니 이 날 인천에서는 우리 비행기 말고도 천 대 이상의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해 인천공항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공항에서 노숙하는 사람도 생겨 난리가 났다는 내용으로 뉴스 보도까지 된 상황이었다. )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항공사에서 샤를드골 공항 근처에 있는 이비스 호텔을 예약해 주어 그곳으로 가면 되었는데 나는 이때만 해도 여행 초보라 이 복잡한 샤를드골 안에서 다른 터미널로 어떻게 이동을 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졌었다. 이미 나의 캐리어는 모로코에서부터 부쳐 둔 상태고 이걸 경유지인 샤를드골에서 찾으려면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직원 분의 말에 핸드캐리 가방만 달랑 들고 호텔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정신을 못 차린 채로 주위를 둘러보니 게이트에는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탑승을 기다리던 모녀가 계셨다. 그분들이 계속 앉아계시길래 다가가서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같이 이동을 권했는데 도중에 어디선가 한국 남자분이 나타나셔서 본인이 찾아볼 테니 따라오라고 하셔서 비로소 조금 안도했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지금도 매우 감사드립니다)


나와 모녀 두 분은 이 구세주 같은 남자분을 따라 재빠른 걸음으로 호텔로 이동했다. 지금의 나라면 오히려 허허 웃으며 즐겼을 텐데 당시에 이렇게 일정이 아예 하루 미뤄진 것은 처음 겪는 일이라 그저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소소한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는 장거리 비행을 염두에 두고 편하게 한국까지 갈 심산으로 모로코에서부터 화장을 다 지우고 파리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캐리어에 담겨 있었으며 핸드캐리 가방에는 치약, 칫솔만 외로이 있었을 뿐 인간의 존엄을 지켜줄 수 있는 것들-샤워 용품이나 기초와 메이크업을 포함한 화장품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갈아 입을 옷은 말해 무엇하리. 저는 이제 어찌합니까.


설상가상, 당시 여성 용품도 비행시간에 맞추어 몇 개만 챙겨서 가방에 넣어왔는데 예상치 못한 항공편 지연으로 이 마저도 부족한 것이었다. 못생김은 참을 수 있지만 생리 현상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어쩔 수 없이 호텔 로비에 있는 자판기에서 여성 용품을 판매하길래 그곳에서 구매를 시도했는데 하필 내 카드가 먹히지 않았다. (모로코만 여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로를 환전해 오지도 않았었다) 누가 봐도 당황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머릿속으로 방법을 생각해내고 있던 그때, 근처에 있던 어떤 한국인 여자분이 오시더니 본인도 여성 용품을 사야 하니 하나를 사서 반을 나누자고 제안을 해오셨다. 스위스를 여행하고 오신 분이었는데 이 분도 생각지 못하게 항공편 지연을 '당하고' 어찌어찌 호텔까지 오게 되었다며 설명을 하시는데 갑자기 동포(?)를 만나서 이야기를 털어놓자니 서러움이 폭발하셨는지 갑자기 내 앞에서 말을 하다 우시기까지 했다.


어쨌든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분의 카드 또한 자판기에 긁히지가 않아 결국 우리 뒤에 줄을 서 계시던 외국인 남자분이 본인이 결제해 주시겠다며 쿨하게 대신 사주셨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지금도 매우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여성 용품 조달에 성공하고 이 여자분과는 내일 아침 게이트까지 같이 가자며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호텔 방엔 TV 하나, 화장실에는 (얼굴도 씻고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할 수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종합 세정제 하나가 덜렁 놓여있었다. 이 쯤되니 '그래,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스킨로션은 못 바르겠지만 하루 정도 얼굴 당기지 뭐' 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공항 노숙이 아닌 게 어딥니까.


아무것도 없는 호텔방. 정신 없던 그 와중에 조식은 야무지게 챙겨먹고 나왔다.


분명 나는 샤를드골에 이른 저녁쯤 도착했었는데 이 모든 정신없는 과정을 끝내고 나니 밤 10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우두커니 호텔 방에 있으려니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해서 택시를 타고 에펠탑이라도 보러 나가볼까 고민을 했지만, 밤의 파리를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할 것 같고 다음 날 새벽 우리 동지(?)들과 게이트까지 함께 가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일찍 잠드는 쪽을 택했다.


돌이켜 보면 돌발 상황에 엄청나게 당황했었는데 한국 분들, 외국 분들 가리지 않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셔서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참 다행이었다. 이가 없어지면 이렇게 날 살려주는 잇몸들이 도처에 계시는구나. 감사한 하루였다. 그리고 조금 초등학생 일기스러운 멘트를 써보자면, 나도 언젠가 타지에서 곤란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꼭 도와주리라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정체 모를, 그러나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종합 세정제의 도움을 받아 덜 더러운 사람으로 거듭난 후 새벽 4시 반부터 식당에 내려가 조식을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역시 부지런한 한국인들. 그래 이게 한국인이지. 이른 시간에도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놀랐던 건 대단한 고급 호텔도 아니고 이비스였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조식 퀄리티가 매우 훌륭했다는 것이다! 미식의 나라는 역시 달라도 다르군.

 

식사 후 부랴부랴 별 거 없는 핸드캐리 짐을 챙겨 로비에서 어제의 동지들(모녀 두 분, 한국 남자분, 나와 여성용품을 공유한 여자분)을 만나 당당하게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에 도착하니 왠지 모를 전우애 같은 것이 느껴져 나는 라뒤레에서 마카롱을 주섬주섬 사서 우리 동지 분들과 나누어 먹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탑승만 하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최대한 게이트 가까운 쪽 의자에 앉아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게이트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설마...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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