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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풋 Aug 11. 2023

항공편 지연이 낳은 15년 만의 우연(2)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예기치 못했던 파리에서의 1박을 거쳐 드디어 대체 항공편으로 한국에 가는 날이 돌아왔다.

혹시나 또 변경이 생길 것을 대비해 최대한 게이트 가까운 쪽 의자에서 일찌감치 대기를 하고 있는데 탑승 시간 전에 항공사 승무원들이 먼저 게이트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이번엔 정말로, 확실하게 집에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승무원들 중 남자 승무원 한 명의 얼굴이 낯익다.

어...? 저 친구는...?

에이 아닐 거야. 승무원 할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얼굴이 너무 닮았는데?

이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승무원을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중에 기내에 들어가면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지 싶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탑승. 모로코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파리에 도착해서 정신없는 시간들을 겪고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니 감격이 밀려왔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제대로 된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의 사랑하는 강아지랑 늘어지게 쉴 생각을 하니 엉덩이가 들썩였다.


미리 예약해 놓은 창가 쪽 좌석에 앉아 탑승 전 보았던 그 승무원이 있는지 계속 두리번거리는데 그 승무원이 자꾸만 내가 앉은 구역 주위를 지나다녔다. 기내에서 내가 앉아있는 주변 구역을 담당하는 듯했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안 보는 척하며 힐끔힐끔 얼굴을 봤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친구가 맞는 것 같은 게 아닌가. 나의 심장은 쓸데없이 콩닥거렸다(불순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친구를 설마 여기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 이름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나름대로 조심해 가며 명찰을 보았는데 세상에. 그 친구가 맞았다! 그 친구는 이름이 외자라 굳이 가까이서 명찰을 보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너, 승무원이 되었구나!



나는 졸업한 대학교에 재수를 해서 들어갔고, 재수를 시작하기 전 다른 학교에 딱 한 달을 다닌 적이 있다. 누군가에겐 매우 짧은 기간일 테지만, 나는 그곳에서의 한 달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을 보물처럼 꽁꽁 싸매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비록 한 달 다니고 자퇴한 학교이긴 하지만 그때 만났던 나의 동기들, 선배들 이름과 얼굴이 여전히 기억 속에 푸른빛으로 선명히 남아있다. 물론 그 친구들에게 나는 그저 한 달 짧게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었을 테니 날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테고 실제 거의 연락도 하지 않지만 당시 동기들 중에 아직까지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가 유일하게 한 명 있긴 하다.


비행기에서 마주친 이 친구는 나의 동기들 중 한 명이었다. 언어를 전공하는 학부라 여자가 대부분이었고 남자 동기는 단 7명뿐이라 오히려 여자 동기들 전원을 기억하진 못해도 남자 동기들은 모두 기억한다. 이 친구는 사실 당시 나와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동기 전체 모임 때 가끔 만나는 정도의 사이라 내가 학교를 자퇴한 후에는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런데 15년 만에, 서울도 아닌 파리에서, 그것도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과 승객으로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다니!


친구는 근무 중이라 그런지 (당연히) 나라는 승객 1에게 눈길을 줄 여유가 없어 보였고 혹시 눈이 마주쳤다 한 들 왠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어서 빨리 알은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순간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나는 어제 캐리어를 모두 빼앗긴 상태로 예상치 못하게 파리에서 얼레벌레 하룻밤을 지낸 사람이 아닌가. 오늘 아침 호텔에 있던 알 수 없는 종합 세정제로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와서 얼굴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못해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태인 데다가 옷도 갈아입지 못해 조금 꼬질했다. 신이시여, 왜 하필 제가 존엄하지 못한 상태일 때 이런 엄청난 우연을 만들어주시는 겁니까. 왜요.



원래라면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을 청했을 텐데 그날은 15년 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가 승무원이라 그런지 (심지어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한 상태라 그런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하루 종일 고생하고 오늘 아침도 새벽에 일어나서 분명 몸이 피곤할 텐데 신기한 일이었다. 알은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다면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하나 등등 혼자서 별별 고민을 다 하며 계속 두리번거렸다. 옆 좌석 사람이 나를 수상한 인물로 신고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친구는 이런 나의 마음도 (당연히) 모른 채 기내 서비스에 집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드디어 기내식이 나오는 시간. 오늘 나의 못생긴 얼굴은 조금 부끄럽지만 이때를 노려 말을 걸어봐야겠다! 도전!


친구는 나에게 눈을 맞추며 친절하게 메뉴 설명을 해주고 메뉴를 고르라고 했다. 일하는 중인 친구가 매우 바빠 보이길래 최대한 민폐가 되지 않도록 나는 아주 빠른 말로 "저기요, 나 oo 대학교 oo학부 잠깐 다닌 적이 있었는데 혹시 나 기억해? 너 그때 동기 〇이 맞지?" 하고 물었다.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아주 근본 없고 기묘한 말이었지만 어쨌든 의미는 전달된 모양이었다.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다시 빠르게 스캔하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럼 이제 내가 그 동기 중 하나였다는 단서를 제공해야 할 차례다. "나 △△(동기 중 한 명)랑은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


나와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동기의 이름도 굉장히 특이한 편이고, 나는 이  △△동기가 승무원 친구와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사실도 △△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친구가 승무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승무원 친구는 내가 말한 △△동기의 이름을 듣고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억한다는 듯한(사실 '하려고 노력하는 듯한'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표정을 지었다.  


놀라긴 했겠지만 어쨌든 기내식 서빙 중이었던 승무원 친구는 짧은 인사를 하고 이따 다시 오겠다고 하며 서빙을 이어나갔다. 기내식 시간이 끝나고 기내 승객들 대부분이 잠들어 조용하던 시간, 친구는 나를 승무원 갤리로 불렀다. 본인은 너무 놀랐다며 처음엔 누군지 몰랐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 기억이 났다며 반가워했다. 당시의 남자 동기들끼리는 아직도 모인다며 △△와도 얼마 전에 만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신기하고 반갑긴 했지만 스스로가 거지꼴인 게 영 마음에 걸려 이 친구가 묻지도 않았는데 어제의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제대로 씻지도 바르지도 못했다는 변명이자 변호를 구구절절 해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혹시 그 남자 동기 모임 또 나가면 기내에서 15년 만에 〇〇〇(내 이름)을 마주쳤는데 못생기고 별로라고는 말하지 말아 줘"라고도 덧붙였다.


친구가 말하길 오늘의 이 만남이 정말 어마어마한 우연인 게, 전혀 연락도 하지 않고 살던 사람들이 15년 만에 해외에서, 그것도 승무원과 승객으로 만나는 것도 물론 신기하지만 그보다 애초에 자신은 이 비행기에 탈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인천 공항에서 항공편이 무더기로 지연되는 바람에 갑자기 자신이 대체 인력으로 이곳에 투입되었고, 승객 300명을 태운 이 비행기 안에서도 내가 앉아 있는 ZONE을 본인이 담당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로 비행이 끝났을 것이라고 했다.


친구가 비행이 거의 끝날 때쯤 몰래 챙겨준 마들렌. 여행 후 쏠쏠한 간식이 되어주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예정대로였더라면 애초에 나는 어제 다른 비행기를 타고 집에 갔었을 사람이었으니까. 친구와 짧게 근황에 대해 얘기하고 '비로소' 연락처를 교환하고 자리로 돌아와 나는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누추한 모습으로 알은체 하는 데까지 작은 용기가 필요하긴 했지만 말을 걸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 중, 내가 깨어 있을 때 친구는 대뜸 컵라면을 끓여다 가져다주기도 했고 오며 가며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어색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열아홉 살 천둥벌거숭이 시절에 잠깐 보았던 친구가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제복을 입은 어엿한 프로 승무원이 되어 승객인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색함보다는 신기하고도 벅차오르는 마음이 들었다. 또 비록 한 달 밖에 다니지 않았던 학교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인연이라는 게 정말 있나 보다 싶었다.


험난한 여정 끝에 인천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기내에서 내릴 무렵, 친구는 나에게 30cm 정도 되는 종이봉투에 과자를 가득 담아 선물로 주었다. 오늘은 줄 것이 이것밖에 없다며 만나서 반가웠다고 했다.  



서울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승무원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난번에 반가웠다고, 남자 동기들한테 나와 우연히 기내에서 마주친 이야기 했더니 다들 반가워했다고.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다고. 자신과 함께 서빙을 했던 인턴사원을 포함해 2명 분의 칭찬 글을 항공사 홈페이지 승무원 칭찬 게시판에 올려 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어디에 들어가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자세히 안내도 해주었다. 하하... 이게 현실이지. 그래, 이제 우리 모두 세상 물정 모르던 열아홉 살 아니고 남의 돈 받아먹고사는 직장인이니까. 나는 흔쾌히 항공사 홈페이지에 칭찬글을 올렸다. 기내에서의 훈훈한 마무리를 반전시키는 칭찬글 부탁 엔딩이었을지라도 내겐 상상도 못 한 곳에서 발생한 놀랍고 신비한 그리고 소중한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역시 아프리카에 다녀오길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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