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틀풋 Aug 31. 2023

자연재해를 온몸으로 맞고 다니는 팔자(2)

간사이 공항이 폐쇄되었다고?

나에겐 골고루 자연재해를 맞고 다닌 해로 기억될 2018년.

7월의 호우 속 탈출 대작전 이후 9월 첫째 주. 나는 또다시 일본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출장을 떠나기 전부터 이 시기에 태풍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클라이언트 측에서 회의 일정에 맞춰 항공을 진작에 발권해 둔 상황이기도 했고 7월에 이미 한 차례 예방 접종(?)을 맞은 우리 팀은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이미 정해진 회의 스케줄을 소화해 내기 위해 일단 일본으로 향했다.

2018년 일본을 강타한 태풍 '제비'의 예상 경로.  일본 웹페이지를 캡처했더니 동해가 일본해,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시된 점이 아쉽다.

일본에 도착하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2018년 8월 말에 발생하여 9월 초까지 일본을 관통한 태풍 '제비'. 일본에서는 태풍 21호로 부르는 역대급 큰 규모의 태풍이었다(일본에서는 태풍을 이름 대신 연초부터 발생한 순서에 따라 '태풍 〇〇호'로 부른다). 이 녀석이 일본을 강타할 것은 예상하고 왔긴 했지만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총 사흘 간의 회의 일정 속에 첫날 오전 일정을 종료하고 보니 기상 상태가 심상치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회의를 모두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전철역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열차 운행을 중단할 예정이라는 공지사항이 붙어있었다. 태풍은 일본 전역 대부분을 훑고 지나가는 경로였는데 우리의 출장 둘째 날, 하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간사이 지역을 관통하는 경로였던 것이다.

태풍으로 인한 열차 중단을 예고하는 안내문과 임시 휴업 안내문. 일본에는 태풍의 계절이 되면 이런 일이 매우 흔하다.


다행히 호텔까지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어쩔 수 없이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회의가 취소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교통수단이 끊긴다=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제한된다=생필품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마트, 식당, 편의점 등에 물건이 들어오지 못하고 직원들도 출근하지 못한다=마트, 식당, 편의점 등이 영업을 중단한다=오늘 중에 내일 필요한 생필품과 식량을 호텔 근처에서 조속히 확보해야 한다


재난 상황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직 열려있던 근처 마트와 편의점에 가서 내일 당장 필요한 물건과 간편식 등의 식량을 조달해 오고 호텔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찌감치 7년 전 동일본 대지진을 혹독하게 겪은 나는 사실 이런 상황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 북상하는 태풍을 막을 도리가 없으며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지나갈 것이라 불안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학습했기 때문이다. 내 앞에 놓인 '사용 가능한' 카드 중 최선의 카드를 '빠른' 판단으로 선택하고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출장 올 때마다 묵었던 호텔은 전철역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언제나 밤늦게까지 열차 소리로 시끄러웠는데, 이 날은 대중교통 운행이 정지된 탓에 온 세상이 고요했다. 대신 그 탓에 바람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왔다. 강풍으로 호텔 창문이 깨지지만 않았으면. 하지만 이런 걱정도 잠시, 다음 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싶어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태풍이 우리가 머무르는 지역을 직격 하는 디데이가 돌아왔다. 클라이언트 분들과 상의 끝에 오전 중에는 상황을 지켜보며 전철 운행 재개를 기다렸다가 재개되면 바로 '탈출 대작전 2탄'을 개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마도 하루 종일 대중교통은 운행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받아들이자.


오전까지만 해도 밖에서는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든 엄청난 강풍이 불긴 했지만 비는 오지 않아 나는 겁도 없이 호텔 근처를 산책하러 나갔다. 재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천하태평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리를 산책하며 사진도 찍고 다행히 열려있는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사다가 호텔방에서 먹으며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당시의 뉴스 속보 화면. 우리가 있는 시가현 쪽으로 엄청난 규모의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

오후가 되자 어마어마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강풍의 영향으로 비는 중력을 거슬러 거의 가로로 내리고 있었다. 타의로 그다지 넓지도 않은 호텔 방에 갇혀 있던 게 힘들었던 나는, 아침 산책 때 호텔에서 도보로 3분 거리 정도에 있는 미용실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미용실로 향했다. 어차피 오늘 이동하긴 글렀지 않은가. 나는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펌과 염색을 동시에 주문했다. 호텔에 갇혀 있는 시간을 되도록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주 이상한 전개가 아닐 수 없다.


태풍 때문에 발 묶인 김에 간 미용실. 영상을 보면 엄청나게 바람이 부는 걸 알 수 있다.

미용실에는 의외로 나 말고도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나처럼 발이 묶여 아무 데도 가지 못해 답답해 나온 동네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평소에는 일 때문에 바빠서 가지 못하는 미용실을 태풍으로 출근을 못하는 김에 이때다 싶어 찾아온 것일까. 미용실 손님들 각자의 사연들에 관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세 시간 남짓 머리를 한 후 다시 재빠르게 호텔로 복귀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교롭게도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출장 온 클라이언트 분과 마주쳤는데 하루 사이에 헤어스타일이 바뀐 나를 보고 그분도 대체 무슨 일이냐며 피식 웃으셨다. 생각해 보면 나라도 어이가 없을 것 같았다. 해외 출장을 와서 태풍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되자 가만히 있기 지루하다고 충동적으로 미용실을 가서 머리를 하다니. 이래서 기업에서는 경력직을 뽑나 보다. 자연재해를 여러 번 겪다 보면 - 그중에서도 전 세계 지진 역사에 기록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같은 메가톤급을 경험하게 되면 -  태풍 정도의 자연재해에는 덤덤하게 대응을 할 수 있게 된다.


어쨌든 강풍 속에서도 기꺼이(?) 영업을 해준 미용실 덕분에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호텔 방에 돌아와 보니 놀라운 뉴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보] 태풍으로 인한 강풍에 떠밀린 유조선이 간사이 국제공항(関西国際空港) 연결 철로에 충돌하여 철로 파손. 공항 폐쇄.


간사이 국제공항은 인공섬에 지어진 곳이라 육지에서 가려면 철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말 그대로 '바람 잘 날 없는' 팔자로구나 껄껄.







작가의 이전글 자연재해를 온몸으로 맞고 다니는 팔자(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