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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 Dec 12. 2019

아이는 부부 사이를 연결해주는 끈일까?

끈 역할을 맡은 자식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아이가 없으면 부부 사이가 쉽게 소원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부부 사이를 연결해줄 수 있는 강력한 끈이 자식이라며. 그 끈이 존재하지 않는 부부는 세월이 흐를수록 관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오랫동안 한 가정에서 '끈 노릇'을 해온 나는 그 말에 반기를 좀 들고 싶다.


남편은 외동아들이다. 한 가정에 두 명의 아이도 다자녀라 불리는 지금 시대에 외동아이는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내 또래에 형제 없는 외동아이는 그리 흔한 존재는 아니었다. 당연히 남편은 어려서부터 한 집에 살던 어른들의 모든 관심과 애정을 한껏 받고 자랐다. 집에서 남편의 역할은 그 세대의 유일한 장남 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이을 차기 가장, 그리고 어른들의 소통 창구였다. 어른들의 의사소통 대부분이 남편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졌다.


어린이였던 남편의 일상은 퇴근한 부모님과 낮에 육아를 담당한 할머니의 가장 주된 대화 주제였다. 청소년 시기에 접어든 뒤로는 직접 어른들의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특히 30년을 넘게 같이 사는 동안 당신과 나는 천성이 너무 다른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은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남편은 두 사람의 말을 전달해주는 전달자였다. 전달자 역할을 하 기 전, 말을 ‘듣기 좋은 소리’로 순화시키는 조정관 역할까지도 그의 몫이었다.


남편이 어른들과 살던 집에서 나온 지금도 그의 역할은 줄지 않았다. 남편과 내가 둘이서 시가에 방문을 하게 되면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종종 하신다.


“너네가 오니까 비로소 어른들끼리 대화도 하고 좋구나. 너네같이 젊은 사람들이 없으면 아무도 말을 안 하니 집안이 너무 적막해. 그러니까 앞으로 자주자주 좀 와라.”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나서야 불현듯 깨달았다. 남편이 나와 결혼하기 전, 왜 본인이 빠지게 될 집안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했었는지. 본인이 없으면 혹시 집안에 큰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해했는지. 남편은 자식으로서 부모님 혹은 어른들 사이를 유일하게 연결해주는 끈이라는 역할에 적지 않은 책임감을 가졌던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아빠와 다투거나 아빠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곤 하는 날에는 ‘자식 하나 보면서 사는 거지.’, ‘자식들이 있으니까 참고 사는 거지 뭐.’라고 내게 말했다. 엄마의 감정에 비교적 무심하게 반응하는 남동생에 비해 나는 정서적으로 가까운 딸이기도 했고, 첫째이기도 했다. 내가 엄마에게 아빠가 채워주지 못하는 행복함을 주어야 하는구나. 내가 엄마한테 가장 잘해줘야 하는구나. 엄마의 말에 무거운 무게감을 느꼈다.


대학생이었던 이십 대의 어느 무렵, 그때부터 이미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삶에는 별 흥미가 없었던 나는 엄마에게 이런 속내를 슬쩍 털어놓은 적이 있다. 펄쩍 뛰며 엄마는 말했다.


 ‘아이가 없으면 나중에 남편이 서운하게 할 때 그 섭섭함을 누구랑 나눌 수 있겠니?’


엄마는 남편도 나를 속속들이 이해 못해주는 타인이고 결국 내 안에서 나온 혈육이 진짜 내 편이라 여겼다. 내 편이 주는 힘으로 삶도 가정도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였으면 엄마의 이런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어느덧 이십 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던 나는 묘한 반발심이 들었다.


‘엄마는 정말 하소연할 때 편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낳은 건가? 나는 엄마 아빠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건가?’


스무 살부터 자취를 시작한 내가 집을 떠난 지 5년쯤 되고 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집에서 부여되었던 많은 내 역할들이,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부단히 해결하려 노력했던 ‘부모님의 일’들이.


한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가정은 즉시 아이의 이름을 따 'OO이네'라고 불린다. 최초 가정의 최소 단위는 연인으로 만나 부부가 된 두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자연스레 가정의 무게 중심은 아이에게 옮겨간다. 아이의 작은 손발 짓이나 아이가 세 끼 챙겨 먹은 음식만으로 부부의 하루 대화 량을 다 채울 정도라니 말이다. 아이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은 가정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아이 이름이 한 가정의 이름으로 불리고, 부부 개인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고 ‘OO이 엄마·아빠’로 불려도 관계 맺기에 불편함 없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늘려가며 살아간다.


이처럼 가정에서 아이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아이가 느끼는 책임감과 부담감도 같이 증가한다. 엄마와 아빠가 다투고 난 후 냉정한 기류를 다시 데우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더 이상 감정 상하는 사람이 없도록 눈치껏 행동해야 하고, '자식을 봐서 내가 참는 거지.'라는 말을 듣고 적당히 모른 척해야 하고, 두 사람 입장을 각자 대변해주는 역할도 하다가 언제쯤 부모님이 화해할까 마음을 졸여야 하고. 싸운 건 부모님이고, 두 당사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 가장 분주한 건 나였다. 그 문제를 풀어야 할 사람은 나인 줄 알았다.


부모 입장에서는 둘의 관계가 위태로울 때마다 그 사이를 다시 조여 주는 끈 역할을 자식에게 바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식 입장에선 내가 부모 사이를 잇는 끈인지 아니면 옭아매 구속하는 줄인 지 혼란스러웠다. 나로 인해 엄마 아빠가 어쩔 수 없이 결혼 생활을 '연명'한다는 그 느낌 때문에 말이다.


아이는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첫번째로 돌봐야 하는 존재이다. 많은 어른들이 이를 간과하는건 아닌지.


자식이 있어야 부부는 갈라설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불안정한 부부 관계의 출렁임 한 번에 온 세계가 흔들리는 아이의 불안을 신경 쓰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른들의 냉담에 혹여 가정이 깨질까 안절부절못하던 아이에게 '우리 괜찮아. 그리고 미안해.' 말을 건넨 어른은 얼마나 될까?


자식을 중간에 끼지 않고 좀처럼 소통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건 자식이 아니라 그 윗세대의 어른들이다. 그동안 아이라는 관심사 이외에 서로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것과 관계 개선에 소홀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역할을 자식에게 슬쩍 미루어 왔음을 미안하게 여겨야 한다.


‘네가 자주 오지 않으니 집안 분위기가 삭막하다.’ ,‘ 네가 없으니 엄마 아빠 사이에 대화 거의 없다.’는 식의 말들은 성인이 된 자식조차 좁은 집 한편 에 꽁꽁 묶어 두는 말이다. 자식은 집 밖의 너른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즐길 새도 없이 집 안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임들을 생각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아빠의 이름은 지워버리고 내 이름을 달아놓은 그 숙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자식은 부부나 집안 어른들의 유대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혈육이라는 상징성과 어린아이 특유의 재롱과 귀여움으로 말이다. 그러나 자식은 어른들의 유대를 돈독히 다지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설령 부모가 그 기대를 갖고 자식을 낳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타인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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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 Phan Phan

브런치: https://brunch.co.kr/@phanphan

인스타그램:@PhanPhan.q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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